문화재 유적지 답사기 - 경복궁, 창덕궁, 석촌동 고분군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문화재 유적지 답사기 - 경복궁, 창덕궁,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답사지 선정이유

2. 사전 내용조사
1. 광화문
2. 사정전
3. 집옥제
4. 지선당과 비현각
5. 만춘전과 천추전
6. 자경전(보물 제 809호)
7. 강녕전
8. 경회루(국보 제 224호)
9. 근정전(국보 제 223호)
10. 교태전

3. 실제답사에서의 조사내용

4. 감상

5. 참고자료

본문내용

5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적 제 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촌동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조성된 백제 시대 고분군으로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근의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과 함게 한성시기 백제초기의 중심 고분군으로서 시기적으로는 3~5세기에 걸친 여러 종류의 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의 대표적인 묘제로는 우선 기단식 돌무지 무덤을 들수 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 무덤이 석촌동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군 지역에는 3.4호분과 같은 대형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관리의 것도 섞여 있다. 그리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서 석촌동 일대에는 오랫동안 다양한 계급의 사람의 묘지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연접된 왕릉급이 쌍분으로서 남분에서는 돌덧널의 형태를 띤 4시의 매장주체가 발견되었으며 그 중 1기의 매장주체는 무덤의 중앙에, 나머지 3기는 그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 쌍분 전통은 압록강 유역의 환인지방의 고력 묘자촌에 보이는 이음식 돌무지 무덤과 연결되고 있어 백제 지배세력이 고구려와 관계가 깊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준다.
2호분에서는 다져쌓기한 부분의 아래서 1기의 널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단지 ·쇠손칼· 철검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석촌동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긴변 45.5m, 짧은변 43.7m, 높이 4.5m의 규모로 형태는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지 무덤이다. 이는 옛 고구려 지역이었던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에 버금가는 크기로서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의 매장주체는 확인되지 않았고 다만 딸린 돌덧널로 생각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출토유물은 그리 많지 않으나 돌무지 사이에서 4세기때의 중국 청자편, 백제 토기와 옥연석, 석추, 금제달개등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4세기 후반경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4호분은 한변이 23∼24m의 정사각형으로 연대는 3호분과 비슷한 시기로 보이나 널무덤과 판축기법을 가미하여 순수 고구려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이 지역에는 지상에 점토로 다져쌓기하여 분구를 만든 후 그 내부에 다수의 널과 독을 매장 주체로 삼는 즙석봉토분이라고 불리는 무덤들도 존재한다. 5호분과 파괴분이라고 불리는 것이 여기에 해당되며 1986년에 3호분 동쪽에서 조사된 에도 있다. 이러한 유형의 묘제는 인근의 가락동에도 분포하고 있으며 돌무지 무덤들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서 백제의 최고 지배층을 형성한 유이민 계통이 아닌 선주민들의 무덤으로 볼수도 있다. 그리고 다수의 매장 주체가 하나의 분구속에 들어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족묘를 볼수 있다. 그리고 다수의 매장 주체가 하나의 분구속에 들어 잇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족묘를 볼수 잇다. 이외에도 것촌동 일대에는 널무덤 독무덤 돌덧널무덤 토광적석묘 대형토곽묘 화장유구등의 다양한 묘제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3세기 중후반 경부터 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300∼400년의 약 100년 동안은 백제 지배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후 공주 천도(475)까지의 백제 지배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바꼈다. 근처 방이동과 가락동 등지의 무덤이 이러한 증거가 된다.
3. 실제 답사에서의 조사내용
석촌동 고분군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내가 처음으로 받은 느낌은 공원에 놀러온 느낌이었다. 넓게 갈린 잔디위에 엄청난 규모의 돌무지무덤들을 보면서 과연 저것이 무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돌계단같았다. 그 규모와 형태에 다시한번 놀랐다.
석촌동 고분은 한성시기 백제 초기의 중심고분군으로서, 시기적으로는 3~5세기에 걸친 여러 종류의 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다.이 유적의 대표적인 묘제로는 기단식 돌무지무덤을 들 수있고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 무덤이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게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군 지역에는 3,4호분과 같은 대형 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것도 섞여 있다. 석촌동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긴 변 45.5m, 짧은 변 43.7m, 높이 4.5m의 규모로 형태는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지 무덤이다.
정말 이 고분을 보고는 "진짜...크다"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어떻게 저런 고분을 쌓을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런 거대한 고분을 쌓으려면 인력의 동원도 상당했으리라 짐작되어 지는데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시 지배층의 영향력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공사를 생각하니 그 어마어마한 규모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4. 감상
고구려의 무덤 형태인 돌무지 무덤이 석촌동에서 발견 됨에 따라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한 세력이라는 설화가 사실적으로 입증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계급의 연관관계를 짐작할수 있었다.
그런 만큼 백제 초기 연구에 이 고분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느낄수 있었다. 백제 한성시대의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만큼 이것의 보존에도 세심한 주의를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전적 지식이 없이 오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원이 한분 계셨으면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같이 간 친구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별 생각없이 지나쳤을게 분명하다. 고분의 양식이나, 배경등을 설명해 준다면 석촌동 고분을 보고 "와 ,크다!"라는 말 이외에도 그고분의 역사적 의의나 중요성을 좀더 느끼고 돌아갈수 있을 것 같다.
5. 참고자료
· http:// user.chollian.net/~waiwai/paekje.htm
·http://khistory.new21.org/home/stu_da/sd3/3-103.htm
·http://www.itourism.co.kr/tourkorea/kn18b.htm
  • 가격2,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6.28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806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