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 루터, 쯔빙글리의 업적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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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칼뱅, 루터, 쯔빙글리의 업적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칼뱅, Jean Calvin 1509∼1564
1) 복음주의로의 전향
2) 교회개혁과 장로제도의 창시
3) 신학사상과 그 영향
4) 칼뱅의 개혁

2.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1) 생애와 활동
2) 저작과 성서강의
3) 사상
4) 루터의 95개조 논제 조항
5) 루터의 개혁

3. 츠빙글리 Ulrich Zwingli 1484∼1531
1) 생애
2) 츠빙글리의 개혁
3) 종교개혁의 정치화

본문내용

다. 또 2차 토론회에서는 성화상과 십자가ㆍ제단ㆍ오르간의 폐지를 제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개토론으로 도시 내 여론을 수렴하여 개혁을 시도하는 방법은 스위스와 독일 남서부 여러 도시의 모범이 되었다. 한편 시 당국과 유착하는 개혁을 불완전한 개혁으로 보는 재세례파와 가톨릭을 고수하는 주(州)의 반발로 스위스 내에서 고립된 그는 독일의 루터파와 제휴하여 신학상의 불일치를 조정하고자 29년 마르부르크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라는 그의 성찬론이 루터의 견해와 대립, 독일 신교파와의 동맹시도가 실패로 끝나 정치적 고립을 초래하게 되었다. 31년 가톨릭 진영과의 싸움에 취리히 소속의 종군목사로 참전하였다가 카펠전투에서 전사하였다.
2) 츠빙글리의 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개성과 그 사상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의 사상을 전한 군소개혁자를 무시하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남 독일에 큰 영향을 끼친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U.츠빙글리는 주목한 만하다. 그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완성하였는데, 이전에는 스위스 인문주의의 흐름에 동조한 사람이었다. 에라스무스에게 크게 공명하여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의 입장에서 성서 중심주의를 주장하고 그리스도교 재생을 생각하고 있었다.
츠빙글리는 <우리고향사람들이 루터의 이름을 듣기 훨씬 전인 1516년에 그리스도의 복음 설교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여 루터와는 별도로 신앙에 의한 의인을 재발견하고 개혁에 착수했던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교 재생의 입장을 종교개혁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 단계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결정적인 대립을 확인한 현대 시점이 아닌, 1520년 전후의 시점에 서서 종교개혁과 인문주의의 관계를 볼 때 양장의 밀접한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츠빙글리의 개혁방식은 도시의 시민적ㆍ정신적 전통에 적합한 것이었다. <도시는 종교개혁운동의 모체, 본래부터 있던 사회기반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다른 여러 도시가 본받게 되었다. 그 개혁방식은 고개토론회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도시의 영방제후의 경우와는 달리, 종적 지배관계가 아닌 횡적인 동료간의 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가 기본 축이었다. 종교개혁을 실시하는 경우에도 명분상으로는 시민의 총의에 근거하였다는 동료적 관계 위에서 실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이 공개토론이다. 이는 도시의 정치를 결정하는 확대시참사회의의 면전에서 다수의 성직자ㆍ신학자ㆍ학자를 모아 놓고 개혁의 가부를 성서에 비춰서 토론하고, 그 토론의 경과와 결론을 반영하여 확대시참사회의가 도시 내의 질서와 평화유지를 도모하면서 개혁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만인사제주의의 원리를 실현한다는 취지로서 가톨릭교회로부터 자립해서 속인인 시민도 참가하여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단결론이 도출되면 도시당국자는 개혁자와 협력하여 위로부터의 개혁통일을 꾀하며 신 교회를 수립해 나갔다. 이 방식은 남독일ㆍ스위스의 각 도시에 도입되어 도시의 종교개혁을 진전시켰다. 한편 개혁자와 도시당국자가 손을 마주잡은 형국으로 개혁을 실시하는 데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츠빙글리를 비롯한 취리히의 젊은 지식인들이 철저한 성서주의와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며 시작한 이 운동은 회개한 자들의 증표로 재세례를 실시하는 재세례파운동으로서 순식간에 도시민중과, 농민전쟁 패배 뒤 우울한 상황 아래 있던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 독일에서는 H.후트ㆍB.후프마이어 등의 활약이 주목되는데, 전파되는 과정에서 신비주의ㆍ천년왕국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운동은 가톨릭ㆍ프로테스탄트 양파의 제후 및 도시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전형적인 예로 뮌스터천년왕국사건(1533 35)을 들 수 있다.
3) 종교개혁의 정치화
종교개혁은 점차 정치적 투쟁의 색채가 짙어갔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교도시동맹을 결성하고 가톨릭 세력에 대항하였다. 루터파 제후의 중심인물이었던 헤센대제 후 필립은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적 대동맹결성을 위해서 1529년 루터, 츠빙글리 등 신학자를 마르부르크에서 모임을 갖게 하여 신학적 일치를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황제 카를 5세는 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국회를 개최하여 종교분열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루터는 제국추방형을 받은 상태라 공식장소에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으므로 그의 측근인 P.멜란히튼이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을 종합해서 제국회의에 제출하였다. 가톨릭과 교리상의 차이를 될 수 있는 한 줄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회답은 로마교회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보름스 칙령의 재실에 의하여 31년 5월 15일까지 로마에 복속하라는 권고를 내려졌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루터파제후는 슈말칼덴동맹을 맺어 정치적으로 결집하여 군사적으로 황제와 가톨릭제후에게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다. 38년 가톨릭측도 뉘른베르크동맹을 결성하여 결국 슈말칼덴전쟁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46년 루터가 사망하고 프로테스탄트 제후의 중심인물이었던 작센제후 모리츠의 배신까지 겹쳐 프로테스탄측은 패배하였다.
48년 황제는 가신조협정을 제국법으로 공포하였는데, 부분적으로 타협할 의사는 보이고 있었으나 신앙에 의한 의인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가신조협정은 프로테스탄트측의 쇠퇴가 심해지자 황제는 승리에 도취되었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아들 필립을 제위계승자로 뽑으려 하고 에스파냐와 독일을 항구적으로 결합시키려고까지 하자 가톨릭제후도 황제에게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모리츠는 한번더 배반하여 신교쪽에서 황제를 공격하였다. 황제군은 패배하고 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결과 영방제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중 어느 한쪽 종파를 선택해서 그것을 신하에게 강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제국도시는 양파병존을 인정하여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츠빙글리파ㆍ칼뱅파ㆍ재세례파를 선택할 신앙의 자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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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8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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