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명예회장의 선박수주와 관련된 협상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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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주영 명예회장의 선박수주와 관련된 협상사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정주영 그는 누구인가?
2. 정주영과 한국경제
3. 정주영과 건설
4. 현대중공업
5. 정주영회장의 성공적 협상사례
6. 정주영 회장의 협상 실패사례
7. 맺음말

본문내용

공과 첨단기법의 도입 등으로 기술 향상을 이루었고 인력관리 면에서도 많은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한 현대건설은 1960년대 초반 다시 한번 어려움에 봉착했다. 정권은 두 번씩이나 바뀌고 재계는 정경유착 시비로 움추리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던 정명예회장과 현대맨들의 노력은 국내최초로 해외진출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주변에서는 우려와 시기가 섞인 부정의 소리가 높았지만 현대건설은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 입찰에서 건설에 관한 많은 경험을 가진 선진국들을 물리치고 공사를 따내 건설한국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대그룹하면 현대자동차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현대그룹의 현대자동차가 이룩한 신화는 실로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발로 ‘자동차 입국'. 우리 손으로 우리 자동차를 만들어 우리 경제를 일으켜보자는 정명예회장의 꿈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남다른 집념과 자신감, 그리고 현대건설의 고도성장으로 축적된 자본을 통해 ‘자동차 입국'의 포부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이후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는 그 다음해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업체인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계약을 체결하여 코티나 자동차를 조립·생산해냈으며, 자동차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마침내 우리 고유모델인 ‘포니'를 생산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로서 마침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자체 고유모델을 생산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은 자신감을 낳는다고 하던가. 건설과 자동차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주영 명예회장은 곧 바로 선박산업을 향해 도전장을 던졌고, 선진국들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몇몇 국가와 끈질긴 협상을 시도한 끝에 영국과 스위스 은행에서 1억불의 차관을 받아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이 거북선이 새겨진 지폐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그 지역의 축도 50000만분의 1의 지도 한 장, 그리고 26만 톤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으로 선주를 설득, 조선소를 건립하기도 전에 배를 수주하는 전대미문의 일을 성사시켰고, 아직까지도 재계의 신화로 남아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다.
이후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휘아래 시작된 울산 조선소는 2년 3개월만에 완공되었으며, ‘조선 한국'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세계경제가 오일쇼크로 위축되어 있던 당시 현대건설이 몰고 온 중동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중동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중동의 건설현장에서는 현대와 태극기의 깃발 아래 한국인의 패기와 성실성이 돋보였으며, 기술과 신용으로 현대는 중동 각지에 세계적인 건설물을 세울 수 있었다.
특히 현대건설이 세계 최대 규모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은 아직까지도 세계 건설업계의 신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로서는 중동 진출을 통해 외화부족으로 경색되어 있던 한국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현대가 결정적 역할을 해낸 시기였다.
이처럼 현대의 도약은 국가경제를 번영의 시기로 이끌었고, 선진 복지국가로의 야심찬 국가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정명예회장의 “최고의 기업은 자신의 성장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현대는 이익을 사회로 환원하기 시작했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기 꿈을 펼쳐나가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기업으로서의 현대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주영 명예회장은 1977년 사재 5백억원을 출연하여 아산재단을 설립하였고, 현재에도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의료사업, 장학사업, 문화사업 등에 전력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대 중·고등학교, 울산대학교를 비롯한 교육 재단을 통해 미래를 이끌어갈 꿈나무들의 양성에도 주력하고 있다.
21세기 경제의 승부사는 첨단기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보다 먼저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하며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는 경제발전의 맥을 짚는 혜안으로 1983년 현대전자 설립하였고, 반도체를 비롯한 신기술 개발에 주력해 국내 정상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1984년, 마북리 종합연구소 등 각종 첨단 기술연구소를 건립하여 신기술 개발 및 인력양성에 주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술입국'을 지향하는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현대가 톡톡히 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현대는 1986년, 사전 시장조사, 판매망 구축, 각종 테스트 등 수많은 난관을 거쳐 마침내 한국 자동차 업계의 숙원이었던 대망의 미국시장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냈으며, 세계 자동차 시장의 다크호스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또한 1989년 당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힘입어 국내 기업인 중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정명예회장은 그곳의 관리들과 남북경제협력에 대해 논의하였고, 원산 수리조선소, 원산 철도 차량공장, 시베리아 개발 등 북한측이 제안한 사안들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 내어 남북한 경제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여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대북사절로서의 현대가 아닌 통일의 물꼬를 트는 통일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현대가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현대그룹은 국내 최대기업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계초일류 기업으로의 성장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96년 새로 취임한 정몽구 그룹회장을 필두로 고객의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경영으로 탈바꿈하는 기업만이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 ‘가치경영'을 선언하는 등 21세기 세계경제의 한 축으로서 일익을 도모할 대비를 하고 있다.
다시금 현대맨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힘차게 뛰고 있으며, 선진 한국의 원동력으로서의 현대가 될 수 있도록 새천년을 향한 뼈를 깍는 현대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할 현대에 대해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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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6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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