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답사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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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답사기행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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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울까?
경포대의 바다는 남해보다더 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늘 어릴적부터 바다와 함께 밀접하게 잘아 왔어도 바다를 볼때마다 감회가 다르다. 더군다나 동해의 바다는 나의 더러운 마음까지도 정화시켜 주는 정화수 인거 같다.
고등학교때 고등학교 건물이 바다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뒤에는 산으로 봄이면 진달래와 각가지 꽃들을 구경할수 있었고 여름이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의 맹함에 한낯절을 보내곤 했었다. 물론 가을,겨울의 바다도 운치가 있다. 나의 고등학교때 늘 나의 곁에는 바다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교에 올라와서 바다를 제대로 본 것이 까마득하다 그런 나의 생활에 경포대는 나의 마음에 일은 아지랑이를 식혀 주었다.
예상했던 데로 걸죽한 하루였다. 국문과 사람들은 어찌나 술을 좋아하고 따르던지 술을 잘못하는 나로써 그들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었다. 새벽 5시쯤 되어서야 우린는 개인의 잠자리로 들수 있었다.
또 하루의 태양은 떠 올라랐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너무나도 초췌하여 초췌한지 조차 알 수 없다. 답사의 마지막 날이다. 왠지 모를 찝찝함고 피곤함은 더 이상 우리들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 각 유적지를 이동할 때 마다 우리들은 외마디 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에서 잠시 깨어 창문넘어 동해의 바다를 보았을 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벅참을 느켰을 것이다. 나또한 피곤함을 웬만큼은 위로해 주는 바다라고 느끼며 눈을 살며지 뜨고 가을햇살을 얼굴가득 담았다.
우리가 답사의 마지막날 처음으로 간곳은 서해교전이 있던 곳의 잠수함이였다. 잠수함 내부를 구경하고 우리는 정동진으로 향한다. 모래시계로 유명한 이곳 말로만 듣던 이곳은 나에게 다른사람보다 더 의미 있게 다가 왔다. 밑지방에서 여기 강릉 까지 올라오기란 예사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난 늘 모래시계로 유명한 그곳 정동진을 그야 말로 말로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그 말로만 듣던 이곳을 오게 될줄이야 꿈에서는 생각해 보았을까???정말 눈이부시도록 맑고 넓은 바다 였다.
우리가 답사의 마지막으로간 유적지는 월정사 였다. 월정사로 올라가는 길에 있던 연못은 불교의 순결한 절제미를 느낄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전에 자신의 소망을 담아 연못으로 던지는 모습을 보며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서 완전할수 없는가? 낙산사에서 하던 그 의문.. 신앞에서 너무 초라해 지는 인간의 모습..연못을 보면서 그런 나의 성찰은 낙산사에 연이어 다시 한번 해보았다. 절에 오게 되면 마음이 숙여해 진다. 왠지 모르게 나 자신이 한단계 올라서면서 내 내면을 깊이를 스스로 재어 보려고 하는듯하다. 이러한 숙연함이 좋았다. 커가는 나의 모습을 느낄수 있다고 할까? 연못의 일면에서 자신의 소망을 비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의 작지만 큰 소원 마음속으로 빌어 보았다.
<월정사>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뒤로 유동보살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 - 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 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았다. - 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그 뒤로 고려 충렬왕 33년(1377)에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이일스님이 중창하고 조선시대까지 계속 법등을 밝혀 왔는데 조선 순조 33년(1833)에 또다시 큰 화재를 입고 말았다. 그런 지 십일 년 뒤인 헌종 10년(1844)에 이르러 영담, 정암 스님 같은 분이 앞장서서 중건하여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였다.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오던 월정사는 1950년 6. 25 전쟁의 참화로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버린 비운을 맞이하였다.
지금의 월정사는 1964년 탄허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그 뒤로 만화스님과 현해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건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엿한 대가람의 모습을 되찾게 된 월정사는 비록 몇 차례 화재와 전화로 많은 성물(聖物)과 문화재를 잃긴 하였으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당우들이며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월정사를 끝으로 답사의 모든 일정은 끝이났다. 유익한 시간이였고 보람 있는 시간이였다. 하지만 월정사를 방문했을 당시 우리들의 모습은 정말 초 죽음이였다. 서로들 너무 많이 지쳐 더 이상의 기력은 없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길 버스안은 적막만이 흘렀다. 때로는 목이 아파서 깨기는 했지만 2박3일의 고단했던 일정탓에 내내 잠에 취해 침 흐르는지 조차 모르고 험한 잠을 잤던거 같다.
_끝!!!!!!!!!!!!!!!!!!!!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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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8.29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4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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