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의 전기[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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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명 부상, 군병사 6명 사망,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약이 없었다.
8월26일:정부군과 전투. 사상자 없음.
8월31일:후위부대의 와나로 도망치다. 호아킨, 타니아, 엘 네그로, 브라울리오, 알레한드로, 모이세스, 활테르, 토로, 마이무라 전사.
9월26일:게릴라(게바라가 이끄는 그룹)에 대한 정부군의 매복 공격. 미겔, 코코, 훌리오 전사. 캄바와 레온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10월6일:계곡에서 게릴라는 정부군 1천 8백명에게 포위됨. 도망갈 길이 없었다.
10월8일:운좋게 탈출한 세 명의 게릴라 중 한 사람 이
었던 베니그노는 게바라의 최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참조)
"볼리비아 군은 우리를 발견했다. 촌장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촌장은 마을의 한 노파와 사원의 경내에서 감자를 파는 그의 아들 두 사람에게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산의 계곡에 배치되었다. 정부군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 2시 반에 이동하기로 했다. 환자가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의 착오가 생겼다. 오전 9시 반 경 잠을 깬 게바라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찰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이 부근 전체를 정찰해 주었으면 좋겠네. 특히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이야'라고 말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파쵸를 동반했다. 나는 그때,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다. 백미터 정도 나아가 전방의 구릉을 살피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때 파죠가 구릉위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동인가 했지만, 목동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가 아침 6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초병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윽고 구릉의 전체에 걸쳐 차례차례로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와 게바라에게 전했다. '최악이다. 저 구릉 전체에 적이 깔려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오른쪽 계곡으로 나가서 적어도 오늘 하룻동안만이라도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밤이 되면 봉우리를 넘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계곡에는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위장을 하였다. 봉우리는 5백미터 정도 앞에 있고 그곳에 군인들이 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모두를 격려하면서 방어체제를 조직하고, 탈출경로를 지시하고, 흩어졌다가 어느 장소에 재집결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계곡의 입구에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파쵸, 아르투로, 윌리가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계곡의 깊은 곳은 폼보와 나토, 우르바노가 맡았다. 계곡의 바위 근
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게바라는 나에게 그리고 가라고 했다. 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시한 그곳은 적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고, 공격을 받을 경우 탈출지점으로도 용이했기 때문에 가야만 했다. 아침 8시, 나는 인티와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11경,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로 다가온 게바라에게 보고했다. 곧 우리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까지 적이 바짝 다가왔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겼다. 나무는 둥치는 곧았고 뭄을 숨기기에도 매우 작은 은폐물이었다. 게바라가 있는 곳에 윌리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아니세트와 엘나토가 폼보와 우르바노가 있는 쪽으로 파견되었다. 폼보 등을 게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세트가 계곡의 중앙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언덕 위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사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반 경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티와 다리오 그리고 나 세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적을 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동지들은 낮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동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총격전을 계속했다. 적군 5명 사망, 부상자 6명 발생.
오후 늦게 폼보가 우르바노와 엘 나토와 함께 우리들이 올라왔던 지점으로 계곡을 건너오려고 했다. 우리는 몸짓으로 그렇게 하면 전멸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숨어있었다. 우리가 모두 다시 집결했을 때, 폼보가 '게바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동시에 그들에게 반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게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시한 집합장소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낭과 발자국이 남아있어서 부상당했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집합장소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봉우리를 넘어서 라 이게라 시가로 돌아가려 할 때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그 이후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라 이게라시가에서 6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관목지대에 몸을 숨겼다.
아침 9시 반 경,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11시 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들려왔다. 후에 그것이 윌리와 엘치노, 또 게바라를 살해하는 총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입회인으로서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 볼리비안인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게바라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함께 붙잡힌 사람은 볼리비아인 광부 윌리와 시몬 쿠바였다. 오후 세시 반 경이었다.
11시15분, CIA는 게바라를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볼리비아인 하사관 마리오 테란이 사형집행인 역을 자원하여 게바라에게 마구 총질을 했다. 또 다시 다른 볼리비안인 페레스 중위가 확인사살로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쏘았다.
1967년 10월 9일 12시, 라틴아메리카 해방전쟁에 생명을 바친 한 사나이가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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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06
  • 저작시기2004.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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