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수군 군사작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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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언

2.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3. 관미성 전투 검토

4. 병신년 전투 검토

5. 맺음말

본문내용

다. 한편 백제는 남양만을 빼앗기면서 해양활동은 물론 대중국 교통로를 잃어버려 정치 외교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경제적으로도 심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개로왕의 죽음과 한성을 상실한 이후에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의 병신년 수군작전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향을 통해서 이루어지면서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왕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경기만의 북쪽은 물론이고 남양, 서산, 당진 등 남부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상당한 기간동안 점령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 朴性鳳, 「위 논문」, pp.630∼631에는 永樂 6年條에 공파한 성들의 명칭과 위치비정 도표가 있다. 손영종은 『위의 책』, p.303에서 예성강 하류, 임진강 중하류와 경기도 동북부, 충북일부 지역으로 보고있다. 한편 李丙燾는 『韓國古代史 硏究』, pp.381∼382에서 이 성과 촌은 주로 한강 및 임진강 유역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대부분 다시 돌려주고 아마 방위상 필요한 임진 이북의 성읍만을 소유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전황으로 보아 한강 이북지역은 이미 대왕 元年 전투에서 확보했고, 이때는 한강 이남지역은 물론 경기만 이남까지 정복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릉비문에 기록된 50여 성은 산성 내지 치소 등 지역중심이었을 것이고
) 盧重國은 지역단위의 성으로 파악 [한성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邊太燮박사 華甲紀念논총}p 142.
, 700여 촌은 주변의 영농생산지였을 것이나
) 朴性鳳, 「위 논문」, p.622.
군사적, 정치적 요충지로서 해안방위와도 관련된 시설들이었을 것이다.
) 盧重國, 앞의 책, p.240에서 '이 성들은 行政區城의 중심이 된 성도 있고 여타의 성은 이 행정구역의 구성체로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하여 행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398년에 아신왕이 반격을 가하고 한산북책에 도달했다는 기사를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阿莘王 7년
보면 396년의 전투 때에 적어도 내륙지방은 한강선을 경계로 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한 이렇게 전개된 상황 속에서 볼 때 이보다 5년 전에 벌어진 관미성 전투는 성 자체의 함락과 함께, 백제가 가진 황해중부의 수군활동을 무력화시킨 의미를 갖고 있다. 만약 관미성의 함락이 실패했었다면 6년에 발진한 고구려의 수군은 백제의 해양방어망과 수군을 배후에 둔 상태에서 후방 깊숙한 해안으로 상륙할 수가 없었다.
경기만은 해상교통 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 고구려는 백제를 한반도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해야 했다. 때문에 수군을 동원하여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병신년 전투 이후에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백제를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뜨린다. 광개토대왕의 해양봉쇄를 통한 연결고리 차단전략이 현실성이 있음은 백제의 대외정책이 변화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폭풍같은 공격에 대하여 백제는 계속해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아신왕은 쌍현성을, 뒤를 이은 전지왕은 사구성을 축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들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가 되버렸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추진한 수군작전을 통하여 그 당시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질서의 재편과정과 해양활동 전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광개토대왕은 꾸준하게 추진되어온 남진정책을 계승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기존의 경계선이 아닌 그 이남지역은 물론 해양이라는 새로운 역사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북진해오는 백제의 예봉을 분쇄하고, 남진하여 영토를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경기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악하여 황해중부 해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아울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거시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에 의해 추진된 남진정책 및 경기만 공격은 고구려의 북진정책 및 국제질서의 재편 전략과 유기적 관련을 맺으면서 추진된 것이다.
대왕은 공격 및 점령 대상이 해양과 관련이 있으므로 수군을 직접 간접으로 활용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보다 확실한 작전은 병신년의 수군 공격이고, 아울러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관미성 전투이다. 백제의 최전방 방어선이며, 수군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관미성은 강화도 북부의 봉천산 지역으로 추정된다. 대왕은 해양활동을 활용한 본격적인 백제공격을 위하여 예비단계로서 난공불락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어 6년에 수군을 친히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때 수군은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쳤으며,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기본복표, 해양작전의 특성, 경기만의 해양전략적 환경, 그리고 해양방어체제의 배치와 구조들을 고려할 때 고구려군은 경기만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외곽포위작전을 펼쳤다. 수군은 3개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다음에 해안의 중심지역을 점령하고 일부는 한성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제 1로는 강화도에 상륙한 다음에 관미성을 선대의 출발기지로 삼아 한강수로를 직공하여 왕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제 2로는 인천만을 중심으로 김포 소래 등의 해안지대에 상륙한 다음에 현재 문학산성으로 추정하는 미추성을 점령한 다음에 한성의 서부지역을 경유하여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제 3로는 남양만을 중심으로 안산만 평택만 등의 해안으로 상륙한 다음에 당성 등 몇 개의 중심성을 근거지로 삼고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에서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전개된 병신년 전투는 삼국시대 한반도 내부의 역학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였으며, 고구려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발언권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해양력이 직접 이용되고,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 후에 장수왕 시대에 들어와 427년에 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천도한 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한강 중부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남진정책의 성공과 경기만의 장악을 토대로 동아지중해 중핵국가의 위치를 획득하고,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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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09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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