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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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사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일제식민지 시대의 방송
2. 미군정시대의 방송
3. 제1공화국 시대의 방송
4. 제2공화국 시대의 방송
5. 제3·4공화국 시대의 방송
6. 제5공화국 시대의 방송

Ⅲ.결론

본문내용

정부에 기부되고 이것이 다시 한국방송공사로 출자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KBS의 출자회사가 되었다. 이러한 대변혁 속에서 우리나라의 방송제도는 공영과 특수방송이 공존하는 체제로 변환되었다.
갑자기 비대해진 KBS는 텔레비전의 경우 제1텔레비전은 종합, 제2텔레비전은 준교육으로 차별화했으며, 라디오의 경우 제1은 종합, 제2는 오락, 제3(라디오서울)은정보중심의 서울 로컬, FM 제1은 고전과 국악중심, 제2는 가요곡과 경음악 중심으로 채널을 특성화했다. 이러한 채널별 특성화 작업과 텔레비전의 컬러화 작업은 동시에 초고속으로 추진되어 1980년 12월 1일 KBS는 부분적으로 NTSC방식으로 컬러시험방송을 개시했다. MBC도 KBS-2와 함께 12월 22일부터 부분적인 컬러시험방송을 개시, 이때부터 공영방송체제에서의 컬러시대가 개막되었다.
1975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ENG(전자식 뉴스취재)카메라는 80년대에 이르러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획기저인 텔레비전 취재방식 보편화에 더욱 힘입어 KBS와 MBC 양사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프로그램 대형화 경쟁이 시작되어 개별 프로그램의 질적인 향상의 계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의 압권은 해방후 생사를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을 텔레비전 메커니즘을 통해 찾아주는 KBS의 `이산가족 찾기' 특집이었다.
제5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방송의 기본법인 방송법은 국보위입법회의에서 1980년 12월 26일에 공포한 언론기본법으로 대체된다. 이 법과 같은 날에 공포된 한국방송광고공사법에 따라 방송위원회와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설립되고 방송의 공적책임과 공정성을 유지하는 임무는 방송위원회가, 방송사에 광고를 청약하는 독점권은 방송광고공사가 각각 갖게 된다. 언론법은 방송의 공적책임과 공공성의 유지를 강조했지만 1985년 제12대 총선거 이후, 특히 보도분야에서 불공정방송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자탄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이윽고 KBS에 대한 시청료 거부운동으로 확산되었다.
Ⅲ.결론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 없고, 장악할려고 시도해서도 안된다."는 6·29선언이 나오고 1987년 11월 20일에 발간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서는 "....방송법안을 새로 만들어 방송국 체제가 공영체제로 확고히 뿌리 내릴 수 있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KBS는 일본의 NHK처럼 명실상부한 공영방송으로 전환될 것이며, MBC도 공영방송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공익장학법인제를 설립, 운영하기로 했습니다.....한편 방송국 체제로 하되, CBS등의 특수 방송의 뉴스보도까지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라는 공약이 실렸다. 1987년 11월 28일 국회는 새 방송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방송공사법도 개정해서 사장을 방송위원회 선임하는 KBS에서 추천하게 되었다.
변화된 사회환경 속에서 1988년 8월 26일 MBC노조는 처음 파업에 돌입했고 8월 29일 황선필사장이 퇴임했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KBS와 MBC는 그 어려운 서울올림픽 대회의 중계방송을 무사히 치러 한국 방송인의 기량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1988년 10월 31일 공약대로 CBS는 보도방송을 재개했다. 10월 28일 KBS이사회는 방송위원회의 추천대로 구성되어 11월 3일 서영훈을 사장으로 추천, 그대로 선임이 되었다.그해 12월 17일 국회는 방송문화진흥회법을 통과시켜 KBS가 국가에 반납한 MBC주식을 인수할 방송문화진흥회의 조직을 가능케 했다. 1989년 1월 9일 방송문화진흥회는 최창봉 방송위원을 사장으로 내정했고 2월 10일에 정식으로 임명했다. 그 후 방송계의 변화를 둘러싸고 한편에서는 노조의 역편파를 걱정했고 다른 한편은 "아직도 민주화가 덜 된 방송을 정부가 재장악할 음모를 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렇게 격변하는 방송환경 속에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각각 80년의 민방 통폐합이 원인무효임을 호소했고 문화방송이 옛 민간주주가 경영하는 기업의 노동조합은 MBC주식의 반환을 주장했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1990년 4월 11일, 서영훈 사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서기원 사장의 취임이 노조에 의해 거부되자 KBS는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4월 15일 평화방송(PBC), 5월 1일 불교방송(BBS), 6월 11일 교통방송(TBS)이 개국, 특수방송이 다양화되었다.
1990년 7월 14일 정부가 제안한 방송법 등 방송관련 3개 법의 개정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8월 1일에 공포되자 80년에 소멸된 민간상업방송제도가 부활되었다. 이 법 따라 10월 31일, 주식회사 태영을 지배 주주로 하는 컨소시엄에 의해 제출된 서울방송 개설 허가신청이 정부로부터 최적격자로 선정되었고 이어서 12월 29일, 서울방송(SBS)은 체신부로부터 무선국 가허가를 취득했다. 신생 서울방송의 라디오는 동아방송이 80년 11월 30까지 사용했던 KBS 제2라디오의 주파수792KHz을 할당받아 1991년 3월 30일에 개국했고 SBS텔레비전은 1991년 12월 9일 채널6, 출력50Kw로 서울·경기 일원을 가시청 지역으로 해서 개국했다. 또 1990년 방송법 개정안에 따른 방송구조 개편으로 KBS로부터 독립한 교육방송은 1990년 12월 27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다시 인수해서 EBS 교육방송으로 갱생했다. 공영과 민영, 국영과 특수방송이 혼재하는 색다른 방송환경이 태어난 것이다.
1990년 이후의 방송환경은 장차 평가되겠지만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민이 좋은 방송을 향수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송제도 아래 방송이 운영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방송제도는 어떻든 그 제도를 운영하는 권한을 가진 쪽에서 어떤 이념으로 방송을 운용하느냐 따라 방송이 국민의 복리 증진을 위한 방송이 될 수도, 또 이른 외면하는 방송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65년간의 한국방송매체의 부침을 회고해 보면서 다시 한번 통감하게 된다.
<참고문헌>
송건호. 한국현대언론사, 삼면사
방송문화진흥회 편, 방송총람, 1991. 12. 나남
정순일. 한국방송의 어제와 오늘, 1991. 8. 나남
KBS편. 한국방송사. 1967.2
KBS편. 한국방송60년사. 19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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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21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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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8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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