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의 기원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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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 리 말
1.한국 불교종파사의 개관
2.조계종의 기원과 확립시기
3.14산문에서 9산문으로
4.조계종의 종조와 법통
맺 음 말

본문내용

에 가장 번영하였고 이에 대한 기존의 기록도 적지 않다.
) 지눌의 인맥을 정리한 기존의 16국사의 계승은 수선사의 주지를 나열하거나 구전을 수요하여 체계가 불확실한 부분도 있으며,오히려 지눌의 인맥으로 수록되었어야할 고승이 제외된 경우도 있다.
다만 15세기 이후의 계승은 뚜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며,이밖에도 그를 종조로 삼기에는 몇가지 무리한 점이 지적된다.무엇보다 그에 앞서 조계종이란 용어가 쓰였으며,그도 사굴산의 중흥조일 뿐이고,그의 활동으로 구산문이 완전이 조계종으로 통합되었다는 증거보다는 반증이 많다.
) 性徹,前揭書.
李智冠,前揭書.
許興植,前揭書.
맺 음 말
조계종의 기원에 대해서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가장 오랜 기간 활발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설이 확립되지 못하고 이설이 분분하다. 그 원인은 한 두가지가 아니겠지만 하나는 조선전기에 불교계에 대한 배척으로 불교계가 스스로 충실한 자료를 남기지 못한 데에 있다.다음은 있는 자료나마 논리적으로 성실하게 해석하거나 체계화하는 과정에 소홀하고 논쟁에 급급한 일면도 없지 않았다.
조계종은 신라말 南宗禪을 이어온 여러 山門의 祖師를 기원으로 삼고 고려초부터 禪宗 또는 曹溪宗으로 불리었다. 이들 여러 산문은 9개의 산문으로 총괄된다는 통설과는 달리 필자는 고려초기까지 14산문이 골격을 이루고 점차 산문간의 구분이 모호한 경향도 나타났으나, 중기에 天台宗의 기반으로 흡수된 5산문을 제외하고 나머지 9산문은 11세기말부터 존속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조계종은 고려초에 성하였으나 광종후반기부터 華嚴宗보다 약화되었고 義天 이후에 천태종으로 분리되면서 더욱 타격을 받았다. 고려후기에 산문의 구분이 다시 엿보이지만, 대체로 山, 迦智山, 曦陽山등 3山門의 활동이 주로 나타난다.그 가운데서 사굴산문의 지눌은 조계종의 사상적 방향을 다시 定立하였고 교종사상을 흡수하여 조선후기에 선종 단일종단으로 존속시키는 방향을 닦았다.
14세기 말에는 太古와 懶翁이 거봉을 이루면서 15세기 불교계의 고승들도 이들의 문도가 주도적 역할을 보였다.조선시대의 게승을 정리한 저술에서 이들 두 고승의 법손이 각각 불교계의 인맥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상반된 법통설을 확립하였으나 그밖에도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체로 태고법통설이 우세하고 오늘날까지도 이를 통설화한 저술이 대부분이다.
) 性徹, 『韓國佛敎의 法脈』海印叢林,1976.增補版 藏經閣, 1990.
후대의 저술보다 당시의 고승이 살던 시기와 15세기의 자료를 정리하고 해석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재검토한 결과에 의하면, 태고법통설은 1620년대에 비롯되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나옹법통설이 보편적으로 지속되었다. 나옹법통설은 임난후인 1610년대까지 존속하였지만 청허휴정의 소장문도에 의하여 태고법통설이 부각되면서 미미하여졌다. 따라서 15.6세기까지는 나옹법통설이 통설화되었고,이는 당시 불교계의 사실성을 반영한 결과였으므로 신빙성이 있다.
) 許興植, 「14,5세기 曹溪宗의 繼承과 法統」『東方學志』73,延世大國學硏究院,1991.
조선전기의 나옹법통설은 내용상 사승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서 나옹이 지공을 계승하였다는 지공계승설과 평산을 계승하였다는 평산계승설,그리고 사굴산문의 계승을 강조하는 3가지 학설이 있을 수 있다.『禪門祖師禮懺華藏畵』에는 사굴산계승설과 指空繼承說을 접목시킨 나옹법통설을 반영하고 있으나 저자를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平山繼承說은 自超가 만든 簇子에 의하여 비롯되었으나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道安의 『佛祖宗派之圖』에 답습되었으므로 본래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잇다.
나옹법통설은 그의 문도 가운데서 누구를 上首弟子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시 混修繼承說과 自超繼承說로 나누어진다.혼수계승설은 나옹의 語錄과 舍利石鍾碑, 그리고 용재총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보다 좀더 보편화되었던 자초계승설은 조선왕조실록,선문조사예참화장화,불조종파지도,삼화상부도비와 교서 등 매우 풍부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자초법통설은 자초에 의하여 혼수를 배제시킨 법통이며, 조선건국과정의 정변에 편승하여 자초가 태조를 움직여 설정하였음이 확인된다.
采永의 海東佛祖源流는 간행년대가 비교적 늦은 18세기의 저술이지만 당시까지 보편화되었던 법통설을 집대성하여 광범위하게 수록하였으나,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나옹의 上首弟子인 혼수를 태고의 문도로 수록함으로써,太古-->混修-->覺雲으로 법통을 연결지우고 있다. 또한 자초를 나옹의 대표적 계승자로 정리하였으나, 이와 달리 懶翁-->混修-->卍雨로 계보를 연결시킨 成俔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후반 세조시에 왕사였던 守眉와 刊經都監에서 활약한 信眉는 모두 나옹의 법손으로 추측된다. 또한 불조원류의 碧溪正心과 淸虛行狀의 淨心은 시기상 다른 인물로 생각되며 당시의 법통은 다시 규명될 과제로 남는다.
조계종의 법통은 저술을 통하여 사상면에서 추적이 가능하다. 祖堂集, 祖原通錄, 法集別行錄 등 중국에서 전하지 않는 초기의 禪籍을 고려에서 중요시하였다. 이와 같이 상고적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혜능을 정통으로 유지하였다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었고, 이 때문에 중국에서 쓰지 않았던 조계종이란 종파명을 표방하지 않았는가 한다.
고려의 조계종은 중국선종의 5家와 적지 않은 사상적 연관이 있었지만, 특히 永明延壽의 저술이 지눌에게 영향으르 주었음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자주 간행되었다. 이는 吳越의 法眼宗이 천태종을 형성시킨 고려의 禪僧뿐 아니라 知訥과 그의 계승자의 사상에도 널리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臨濟宗의 大慧宗 , 育王介諶, 溫陵戒環, 蒙山德異, 鐵山紹瓊 등은 坦然과 知訥, 그리고 그 계승자에게 깊은 사상적 흔적을 남겼다. 고려말의 石屋과 平山이 각각 태고와 나옹에게 계승시킨 사상적 영향은 연속적인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나옹은 평산보다 指空의 절대적 감화를 받음으로써 조선시대의 불교에 특성을 나타냈다고 정리될 수 있다.나옹의 폭넓은 사상과 문도의 계승이야말로 불교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법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고 정리된다.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필자가 시도한 조계종의 기원과 법통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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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01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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