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때 일본및중국과의 교육문화교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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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시대때 일본및중국과의 교육문화교류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삼국시대의 교육
가. 고구려의 교육
나. 백제의 교육
다. 신라의 교육
라. 삼국시대의 교육의 특징
2. 삼국시대(백제)의 교육문화교류
가. 6,7세기 백제와 일본의 관계
나. 일본 문화 속에 나타난 백제 문화의 성격

Ⅲ. 결론

본문내용

있다 일본은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언제나 왕인을 이용했다. 1892년 청일전쟁을 위해서 왕인 묘역을 정화했고 1899년 노일전쟁을 위해 또다시 정화작업을 폈다. 제2차대전 발발 직적엔 우에노공원에 비석을 세워 한국의 혼을 들먹였으며 왕인의 기라성같은 후예들을 이용코자했던 것이다.
백제의 문화·문명을 일본에 전달한 우리의 선현은 왕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왕인의 뒤를 이어 많은 학자와 기술자가 잇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들의 피와 땀방울이 쌓이고 쌓여 일본을 개화시키고 문명국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왕인 의 위치는 유독 뛰어났다. 일본 황실과 직결되어 그의 학문은 더욱 빛났다. 일본의 초빙을 받아 건너간 왕인의 가르침은 일본문화의 기초를 닦았으니 그의 위업은 위대한 것이었다
) 송형섭『일본속의 백제문화』 P.103
.
ㄴ. 칠 지 도
석상신궁의 약기를 보면 신공(神功)황후 섭정 53년에 백제인 구(久)씨들이 칠지도를 헌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모양은 여느 칼과는 다르다.
나뭇가지 형상을 한 괴이한 칼인데 이것이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섭관계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일본은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칠지도의 모양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칠지도는 쇠로 만든 양날의 칼이다.
양날의 방향에 좌우 교체하여 3개씩 작은 가지가 있고 나뭇 가지와 같이 비스듬하게 위로 향해서 나와 있다. 칼날의 길이는 75cm. 밑에서15.7cm 정도의 지점(네 번째 가지와 다서 번째 가지 사이)에서 둘로 잘려져 있다. 1천5백년 이사의 옛 칼날이라서 현재는 쇠의 풍화와 녹으로 이동조차 곤란한 상태에 있다. 너무 오래되어 잘못 움직이게 되면 원형조차 없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진귀한 칼이 오랫 동안 이곳에 사장된 채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명치 연간에 들어와 갑자기 학계에 커다란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것은 이 칼의 앞뒤에 중요한 사실을 증명할 만한 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앞면에 34자, 뒷면엔 27자 모두 61자가 금상감(표면에 무늬·글씨를 파고 그 속에 금동을 채우는 기술과 작품)으로 세로 한 줄씩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한 녹과 손상으로 글자의 판독이 매우 어렵다. 이 명문에 관한 연구는 복산민남(福山敏男)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의 판독은 다음과 같다.
'태화(太和)4년(서기 369년)4월 11일의 낮 정오에 백련의 철로써 하모(何某)가 제작하였다'.
'백제왕의 세자가 은혜를 입은 왜(倭)왕의 뜻을 위하여 만들었으니 길이 후세에 전하리라'
이 해석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태시(泰始)4년이라고 읽고있는 것을 태화라고 읽어서 태화 4년(서기369년)에 해당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야마모토 조정이 최초로 한반도 '대원정길'에 오른 해에 해당되고 있다. 따라서 만약 이 판독이 옳다고 하면 신공기(神功紀)의 기사와 연결해서 이 칼은 백제와 일본간의 교섭개시와 깊은 관계 아래서 제작됐고 만든지 3년후에 백제가 일본조정에 헌상했다고 하는 풀이가 된다.
) 최재양 『백제의 대화왜와 일본화 과정』 P.125
이같은 해석의 진부는 차치하고 이 명문 속에 나오는 글귀를 미루어 보아 4세기 후반기에 백제와 일본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문화의 수준이, 칠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쇠 다루는 기술을 볼 때 얼마나 높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같이 칠지도는 역사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귀중한 가치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백제의 쇠 다루는 기술로 완성도니 백제도검이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고검(古劍)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특이한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일본도의 원조도 실은 한국인이다. 10세기까지 밋밋한 직도로 칼의 형태만 갖춘 원시적인 것이었던 것이 11세기에 들어와 고려에서 건너간 도장(刀匠) '뿐만 아니라 제검술에 앞서는 제철·단철도 한국인에 의해 전래된 것이다. 제철술의 원조는 고구려식 단철술이고 백제식 단철술이다. 결론적으로는 고대 일본이 가장 탐스러워한 것도 한국의 철과 철기문화였던 것이다.
Ⅲ. 結 論
삼국시대의 시대적 배경이 먼저 밖으로는 중국의 침입으로 인해 고조선 멸망한 이후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에 의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기 주위 여러 세력을 부속, 통합 하면서 고대국가가 성립되어 의며, 종교적으로는 불교, 한문 유학이 전래되어 선진적 교육 제도와 내용이 삼국시대 각 나라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적 정치체제 정비하고 엄격한 계급제도가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 다양한 특색을 나타낸다
좀더 세부적이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고구려는 육로로 외래 문화와 접할 기회가 많아 삼국에 외래 문화 전수국 역할을 톡톡히 하였으며, 우리 나라 최초의 관학(官學)을 세웠으며, 백제의 뚜렷한 특징은 우수한 한국 문화를 일본에 전수 시킴으로써 문화의 우월성을 충분히 과시 하였다. 비록 그 뒤로 국가의 존패에 따라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우리 백제인의 얼이 새겨진 문화재가 발견되어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는 외래 문화를 흡수하여 이를 융합하여 통일 신라 시대까지 이어오도록 한국 문화의 전통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상 우리의 고대 조상들이 중국 문화를 어떤 변별력 있게 받아 들렸는지와 어떻게 일본땅에 건너가 정착했으며 문화·문물을 어떻게 전파했는지 알아보았다.
이제 조상들이 전파한 문화·문물의 유적들은 지금도 찬연히 빛나고 있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며, 지금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긍정적으로 발전하여 조상들의 뜻에 한목더 기여 해야 하겠다.
◈ 參 考 文 獻 ◈
◎ 장덕삼, 『新敎育史, 哲學』, 재동문화사, 1997.
◎ 최재양, 『百濟의 大和倭와 日本化過政』, 일신사, 1990.
◎ 최필승, 『古代 韓日關係史』, 한마당, 1988
◎ 부지영, 『日本, 또 하나의 韓國』, 한송, 1997.
◎ 송형섭, 『日本속의 百濟文化』, 한겨례, 1988.
◎ 죤.W.홀, 『日本史』, 역민사, 1988.
◎ 시바 료타로, 도날드 킨, 『日本人과 日本文化』,
을유문화사, 1993.

키워드

삼국시대,   일본,   중국,   교육문화,   교류,   신라,   고구려,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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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25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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