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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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양반의 신분으로서 국민 국가 건설을 외쳐>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눈길 끄는 신정강령 14개조>
<甲申日錄의 저작>

본문내용

부터 12월 6일까지 김옥균과 후트가 서로 접견한 것은 갑신일록이나 윤 일기 모두 4회로 되어 있다. 山邊健太郞씨는 그의 논문에서 갑신일록을 믿을 수 없는 저작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김옥균이 미국공사와의 면담은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일을 미국공사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기 위해서 허위로 쓴 것이라고 하였으나, 위에서 지적한 것을 보아도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알 것이다. 더욱이 앞에서 인용한 윤 일기 11월 29일 조에.
是夜 古愚來訪美使 美使勸基廣會有法 靜觀時機 勿爲驟進 反害開化之道 古遇稱是…
라고 있으니, 김옥균은 후트 공사를 찾아가 개화당의 진로에 대해서도 기탄없이 상의하였던 것이다. 山邊씨는 그밖에도 몇 가지 문제를 들고 갑신일록의 내용을 부정하고 있으나, 사소한 오류를 지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갑신일록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신뢰할 수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신일록의 저작과 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면 요컨대 갑신일록은 갑신정변이 있은 지 약 1년이 경과된 1885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저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저작할 당시의 김옥균은 정변의 실패로 같이 망명한 동지들마저 대부분 미국으로 떠나버려 외로운 처지에 있었다. 집필하게 된 동기는 첫째로 정변을 주도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느끼어 정변의 전미를 적어두어야 되겠다는 생각과 둘째로는 일본의 배신적 행동을 규탄하려는데 있었다. 김옥균은 본시 집필이 끝나는 대로 신문지상이나 단행본으로 발표하려고 계획하였을 것이지만, 일본정부에서 그를 냉대하고 위험시하였던 관계로 인쇄물로 발표할 없었다. 그리하여 사본으로 널리 내외에 전파케 되었다. 갑신일록의 총 자수는 18,000에 달하는데, 김옥균은 이것을 저작함에 있어서 아무런 메모(비망록)도 갖지 못한 채, 전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썼던 것 같다. 이에 따라 많은 착오를 범하게 되었다. 특히 날자(시일)중에는 뒤바뀐 것이 많다. 그러므로 갑신정록을 史科로 이용하려면 신중한 검계를 요한다.
그러나 오류가 있다 해도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전반적인 내용의 줄거리를 뒤엎는 착오는 아닌 것 같다. 몇 가지의 근본사과와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김옥균은 전연 있지도 않았던 사천이나 논의도 되지 않는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갑신일록은 부분적으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해도, 전반적인 내용은 신뢰할 수 있는 저작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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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8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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