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의 지방민의 동향과 농민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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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신라 하대의 지방민의 동향
1)신라 하대 사회의 성격
2)귀족지배층의 과중한 수취
3)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2.농민항쟁
1)농민층의 도적봉기
2)농민항쟁으로의 발전
3)각 지역의 농민군과 초적의 활동
4)신라 하대 농민항쟁의 역사적 성격
통일 신라말 농민 항쟁의 사회적 성격
머리말
Ⅰ농민항쟁의 배경
1.신라 말기의 사회상황
2. 농민항쟁의 원인
Ⅱ.농민항쟁의 전개
1.농민층의 봉기 봉기
2.농민항쟁의 전개
Ⅲ농민항쟁의 의의
1. 지방세력의 성장과 후삼국 성립
2. 농민항쟁의 사회적 의의 및 성격

본문내용

전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농민군이나 초적이 활동을 했다.
전남 압해현(압해도)에서는 능창(能昌)이 거느린 농민군과 그 주변의 갈초도에서의 초적이 서로 연결하여 활동을 전개했는데 서해의 해안과 도서지방에 농민군의 활동근거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간지대를 근거로 산길 또는 길목을 막거나 아니면 주변고을이나 성을 습격하기도 했고 대규모의 토지를 집적한 사원을 습격하기도 했다.
해인사의 경우 사원의 습격이 잦아지자 사원세력은 일반백성이나 승려들을 조직하여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농민항쟁의 공격대상은 반드시 중앙정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서 농민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지방세력가들은 강력한 자위조직을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농민군을 진압했고, 농민군을 점차 그들의 하부 조직으로 편성시켜 지방세력가들은 조직적이고 독립적인 세력이 된다. 흔히 호족이라 불리는 이들 세력의 우두머리들은 성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면서 상하의 관직체계까지 갖춘 독자적인 조직을 거느리기도 하였다.
Ⅲ농민항쟁의 의의
1. 지방세력의 성장과 후삼국 성립
9세기 후반 전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자 신라국가의 통치기반이 급속하게 와해되면서, 농민군, 초적들은 신라 정부군이나 지방군의 커다란 저항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농민군이나 초적들의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자 피해를 당하는 계층들은 그에 대한 무력 대응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관리들은 주, 현, 군에 속했던 지방군과 사병을 활용하여 무장력을 갖추고자 하였고, 사원의 경우도 부호세력이나 촌주층과 같은 지방세력에 의탁하여 그들의 재산과 안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방세력이란 이전에는 호족이라 불렀던 성주와 장군들로서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신분제에 의해서 정치적 기회가 봉쇄되어 있던 바, 중앙귀족들에 대한 반발의식이 팽배한 집단으로서 당시 몰락해 가는 중앙귀족과 연결되지 않았기에 신라 국가와는 거의 독립적으로 자위력을 보호하여 각 지역의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후에는 일부 농민군들 중 성주 장군과 같은 지방세력으로 전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지배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무력대결로 인해 여러 작은 세력의 재편 결과 후백제와 태봉의 성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에서 농사를 지어 장군이 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었다 한다. 그는 출신기반이 중앙관리나 지방관리가 아닌 지방의 미미한 가문이라고 보이며, 이는 전공(戰功)으로서 비장(裨將)이 되었고, 농민군을 규합하여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견훤은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를 치고서, 그 곳을 근거지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공공연히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농민군을 규합하여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후, 900년에 드디어 후백제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였다. 그는
내외적으로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여 지배기관을 강화하였다.
태봉국을 건국한 궁예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왕위쟁탈전 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산속에서 은둔하던 중 농민군 휘하에 합류하여 진성여왕 8년(894)자신을 장군이라 칭하고, 895년에 강원도와 패서의 농민군과 토착세력들이 합세하자 개국 할 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君을 자칭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는 901년 국호를 고려라 칭하고 자신을 왕이라 부르게 하였다. 즉 그는 골품제의 규제로 운영되던 신라를 전면 부정함으로써 고구려 부흥운동을 결합시켜 세력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 인물은 지방군의 비장출신이고, 몰락한 왕족출신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지방세력으로 성장하는데는 농민군과 초적의 무리들이 중요한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는 점. 즉 농민군을 규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다음 스스로를 장군, 왕이라 칭하고, 각각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과 신라 타도를 주장하면서 후백제, 태봉을 건국한 것이 공통적이라 하겠다. 또한 원신라에 비해 변방수비나, 조세, 공물운반 부담이 가중되어 상대적으로 사회 경제적 모순이 보다 심했던 옛백제, 고구려지역에서의 民들의 반신라 감정의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였던 바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이러한 후백제, 태봉의 성립 뒤에 농민군을 무력기반으로 한 지방세력들간의 무력 경쟁속에서 후삼국의 정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2. 농민항쟁의 사회적 의의 및 성격
신라 하대의 농민항쟁은 기본적으로 토지 소유 집중화 현상에 따른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 나타난 변혁운동 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의 발생에는 귀족들에 의한 수취의 증대와 더불어 자연적 요인으로서의 자연재해 등의 요인과 신라 하대의 농민에 대한 이중적 지배구조의 모순이 작용한 바가 크다 하겠다. 결국 농민층의 빈곤과 유망, 도적화는 9세기 말 농민항쟁으로 확대되었으며, 과다한 수취가 가능했던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과 나아가 지배구조를 용인하고 있던 신라국가의 지배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운동으로 확대,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변혁운동은 불합리한 지배구조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점차적인 국가세력의 몰락으로 인한 지배구조의 폐기로 투쟁의 열기가 식으면서 농민들 스스로 지방세력에 의탁해 가면서 정치적 변혁의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맺음말
신라 하대의 농민항쟁은 농민층의 유망으로 시작해서 후삼국간의 국내전쟁으로 까지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소집단 규모로 분산적인 항쟁을 하다가 신라 사회의 사회, 경제적 모순이 심화 되면서 점차 조직화 되어 국가를 상대로 항쟁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900년 이후 후삼국 사이의 전쟁과정에서 지방세력은 농민들의 항쟁을 자신들의 정치적 강화에 적극 이용하여 마침내 그들 주체의 고려를 성립시켰다. 즉 신라 하대 농민항쟁은 신라국가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했고, 후삼국 통일과 고려의 성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겠다. 그러나 이와같은 농민항쟁은 후에 건립된 고려시기에서 불합리한 수취제도의 어느정도 개선을 통해 농민자신들의 부담완화를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지위와 처지를 향상시키는데는 크게 기여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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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8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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