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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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 리 말

2. 본 론

2-1. ‘사대(事大)’의 어원 및 내포된 의미
2-2. 사대정책의 발현 배경
2-3. 중화주의 및 소중화주의의 형성과정
2-4. 사대정책 및 중화주의의 시대별 변화 양상
2-5. 왜 ‘조선의 사대주의’에 주목해야 하는지와 사대정책이
조선사회에 미친 긍정적·부정적 영향 서술
2-6. 사대정책에서 보이는 자존의식
2-7. 당시의 사대에 대한 인식과 오늘날의 인식사이에 생긴
괴리의 원인 분석 및 극복방안

3. 결론

본문내용

예를 행하나 지나치게 공손하거나 후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중국에 어려움을 호소하더라도 예가 아닌 구차한 일은 없었다. 비록 황제의 명령이라도 법식상례나 예제에 어긋나면 따르지 않겠다는 굳건한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또한 그것만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을 한집안 또는 조선의 백성도 황제의 적자라고 하면서도, 양국간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사대의 정성에 유별났던 선조의 경우에도 국경의 구분을 정확히 하여 중국사람이라도 흠차관이 아니거나 공문이 없으면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대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내지는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조선과 중국이 일가가 되었다고 자부하면서도 현실문제에 있어서만은 예의와는 무관한 일로 보고, 중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하며, 만일 중국이 이러한 문제에 개입하는 것도 예가 아니라고 보았다. 즉 “국가의 대계란 반드시 낭묘(묘당)에서 결정하는 것이므로 그것의 조종과 신축에 대해서는 외국이 간여하여 말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하여 국가의 중대한 계책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외국이 간여할 바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2-7. 당시의 사대에 대한 인식과 오늘날의 인식사이에 생긴 괴리의 원인 분석 및
극복방안
사대주의라는 용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학자들이 통치의 명분확보를 위해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제시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중국적 세계질서와 서양적 세계질서가 충돌하면서 우리역사에서 주요문제로 부각 되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서양세력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개인주의사상에 입각한 서양식의 세계질서가 힘으로 중국식 세계질서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모두 평등하듯이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도 대등하기에 국가간에 위계서열적인 의례관계를 맺는 중국식의 세계질서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봉조제도 또한 이해할 수가 없는 사항이었고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의례적인 봉조관계를 새롭게 검토하게 된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청국에 대한 사대를 고집한 보수지배세력(사대보수당)과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 청산을 주장한 개화파(개화독립당)간의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각각 서양적 세계질서와 중국적 세계질서를 대표하는 일본과 청 사이의 건곤일척의 한판 대승부가 조선에서 벌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려 노력하는 중에 국치를 당했고 일본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기네가 조선을 강점한 것은 필연적이었음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물이 ‘사대주의‘인 것이다. 우선 중국적 세계질서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우리의 자율적 사대의례관행을 서양적 시각으로 재단하므로써 타율성으로 해석하고 나아가 우리의 역사를 남에게 의지하는 역사, 즉 외세의존적 사대주의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이러한 사대주의경향은 대륙도 아니고 섬나라도 아닌 반도국가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 특성에 연유한다는 지리적 결정론까지 내세움으로써 한국인으로 하여금 주권상실의 이유를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숙명론적 체념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한국인에게 민족적 열등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광복이후 우리의 의지가 아닌 외세의 개입으로 나라가 반으로 갈리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면서 한국인은 한계적 체험을 하게 된것이다. 이로 인한 자기비하의 관념이 더해져서 일본학자들의 사대주의론을 무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강해지게 되었다.
3. 결론
서구의 과학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오늘날 개인주의 및 평등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적
세계질서에 익숙한 우리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무척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서양인들이 아직까지도 동경하는 높은 정신문명이 이룩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다만 분명히 아쉬운 것은 너무 정신세계만 추구하다보니 실용위주의 문물의 개발이나 무기류의 개발이 서양에 뒤쳐져 결국은 그들의 발아래 밟히는 치욕을 경험해야만 했던 점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중화주의는 유학의 사상에 바탕을 둔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통용되던 매우 합리적인 세계질서라는 것이며 오늘날 국제관계가 국가간의 분쟁을 되도록이면 전쟁을 피하고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처럼 국가간의 평화적 공존을 꾀했던 정책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국가간의 무력충돌없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평화는 앞서 서술했듯이 높은 정신문명을 이룩하게 하는 근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상무정신을 약화시키고 물질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결과 또한 낳았다. 우리는 이점을 확연히 인식하고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악의적인 역사왜곡의 굴레를 하루빨리 벗어버리고 바른 역사인식을 할 수 있어야 겠다.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사관에서 우리의 역사를 휘황찬란하게 서술한 태도 또한 경계해야겠다. 아울러 사대주의가 아닌 사대는 한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뤄왔으며, 그것은 곧 한국의 가족주의적 문화전통 속에서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겠다.
※ 토론사항
1. 사대정책은 일반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정책이었는가?
2. 일본이 몇십년간 동안 우리 역사를 조작 및 왜곡한 것만으로 어떻게 오늘날의 인식이
약 500년간 굳게 자리잡아왔던 본질로부터 괴리될 수 있었을까?
☆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0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백과사전 내 참고문헌 : 한국사 신론 (이기백, 일조각)
민족과 역사 (이기백, 일조각)
고대 중국적 세계질서 연구 (김한규, 일조각)
한국문화연구 (강신표, 현암사)
중국의 천하사상 (전해종 외 , 민음사)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김영사)
-한국사 23 (정두희 외 5명, 한길사)
-실천민속학 연구 1 → 민속문화의 수용과 변용 (실천민속학회, 집문당)
-조선왕조사 1 (이성무, 동방미디어)
-조선시대 중국과의 사대자소관계에 대한 인식
(권선홍-부산외국어대학교 외교학과, 국제문제론총 11)
-지식까지 찾아주는 검색, 네이버 (지식검색) 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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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1.09
  • 저작시기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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