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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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등소평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등소평에 대해서

1.등소평의 일생

2.등소평의 결혼생활과 가족

3 등소평의 집안 내력

4 등소평의 실책

5. 흰고양이 검은고양이와 작은 대포

가. 흰고양이 검은고양이(白猫黑猫)

나. "작은 대포(小鋼?)"라는 별명의 유래

다. 천륜의 즐거움

6. 개혁 개방의 가속화

7. 등소평의 취미 생활

8. '죽의장막' 걷고 개방, 중국 경제개혁 점화

가. 몇 차례 실각 불구 정계 복귀

나.1981년 주석 올라 권력장악

다. 천안문 시위 탱크 진압

라. 정치개혁엔 보수적

본문내용

목표했거나 예견한 것일까. 그에게는 적어도 어떤 부작용이 있더라도 중국이라는 나라를 부강시켜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는 2000년대 세계 강국을 목표로 한 생산력 증대의 필요성을 되풀이 강조했다.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는 가능한 사람과 가능한 지역이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선부론(先富論)'을 주장해 지역간 계층간 개인간의 차이를 받아들여야 함을 분명히 했다.
나.1981년 주석 올라 권력장악
덩의 이런 입장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민족주의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일부 중국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열강의 침략과 군벌들의 발호로 특징지어진 192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중국혁명 1세대들에게 공산주의란 민족을 도탄에서 구해낼 수 있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에게는 중국과 중국 인민이 일어서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혁명가이며 사상가였던 마오와 달리 행정가에 가깝던 덩이 공산주의적 교조를 벗어던지기는 더욱 쉬웠다. 그는 마오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운동이 실패로 끝난 것을 보고 일찍이 1962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통해 현실주의에 입각한 생산력 우선주의를 내보였다.
이러한 그의 현신주의는 쓰촨성 광안현의 개명한 지방 엘리트였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지방의 토호였던 그의 아버지는 신해혁명에 동조적이었고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에 일찍 눈떴다. 그는 자신의 큰아들인 샤오핑에게 신학문을 배우러 충칭으로 나가게 했다.
충칭에서 1년간 공부한 그는 더 새로운 학문을 찾아 열여섯 살인 1920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그는 공장에 다니며 고학을 했고 당시 한 사조를 이루고 있던 공산주의에 경도됐다. 파리에서 공산주의청년단 활동을 한 그는 그후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해 장장과 중일전쟁 등에 참가하면서 당과 군의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혁명기간 내내 마오의 노선을 일관되게 추종해 1933년 장쑤성 당위 서기로 있을 때는 '마오의 장쑤소조 수령'이라는 죄목으로 해직돼 1차 실각을 당하기도 했던 덩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경제정책 등에서 마오와 차이를 드러냈다. 혁명가 마오는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자신의 혁명적 비전을 사회에 강제적으로 적용하려 했으나 덩은 현실이야말로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새로운 방향전환을 촉구했다. 마오와의 이런 입장 차는 문혁기간 두 차례에 걸쳐 '주자파', '죽어도 반성 않는 당내 실권파' 등으로 지목돼 실각하는 이유가 됐다.
다. 천안문 시위 탱크 진압
그러나 덩은 자신의 실각에도 불구하고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1969년 실각돼 장시성 난창에서 트랙터 수리공으로 3년 반을 보낸 후 1973년 국무원 부총리에 복권된 덩은 과감한 탈문혁정책으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마오는 그의 재추방을 결심하고 마침내 저우 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청명절 시위의 배후로 덩을 지목해 1976년 4월 7일 부총리에서 해임했다. 그렇지만 덩은 마오의 사후 천윈(陳雲), 리센녠(李先念) 등의 도움으로 1977년 3월 다시 정계에 복귀해 '부도옹(不倒翁: 오뚝이)'임을 내외에 과시했다.
그후 그는 자신의 측근들을 차례로 당정의 요직에 포진시키고 마침내 1981년 화궈펑(華國鋒)을 총서기직에서 내몬 후 측근 후 야오방(胡耀邦)을 옹립하고 자신은 당 중앙군사위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덩샤오핑 시대를 열었다.
덩은 마오 시대의 경제정책의 과오가 중국을 제3세계의 변방에 머물게 했다고 믿고 사회주의의 실현을 좀더 먼 미래의 일로 설정했다. 그는 중국을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설정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초급단계가 앞으로 백 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 중국은 연간 10%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지속해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에 뒤이은 경제개발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듯 쓰러져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그의 성격을 일찍이 마오는 흐루시초프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작은 고추가 매운 법입니다. 그는 장제스(蔣介石)의 백만대군을 무찔러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결정적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마오는 또 1973년 덩을 재기용하면서 "비단 속에 침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덩의 비단 속에 싸인 침은 1987년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에 동조적이었던 후 야오방을 실각시키고 2년 뒤 천안문 민주화 시위를 탱크로 진압한 데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자신이 내건 '국부 건설'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떠한 장애물도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에선 동아시아의 개발독재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덩은 경제개혁에 대한 일관된 지지에도 불구하고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언제나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에게 밝힌 개혁파와 보수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방에서는 중국 지도자를 개혁파와 보수파로 나누고 나를 개혁파로 분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 사회의 변화를 지지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나는 개혁파지만(공산당 지배 등) 4개 원칙의 지지자를 보수파라고 한다면 나는 보수파다."
라. 정치개혁엔 보수적
그는 중국 12억 인구의 4분의 1일 문맹인 현실에서 직접선거 등 서방식 민주주의를 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이런 현실인식은 경제성장과 부의 증대가 인민들의 정치적 욕구를 분출시키고 그것을 억압정책만으로 가둘 수 없음을 보여준 한국과 대만의 사례에 비춰볼 때 실제 현실과 괴리를 보이고 있다. 천안문 사태 당시 한 지식인이 『뉴레프트 리뷰』에서 썼듯이 그에게 인민은 아직도 '자신이 계도하고 이끌어줘야 할 대상'일 뿐이다.
덩의 개혁은 1987년 민주화 시위와 89년 천안문 사태처럼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새로운 인간군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결과 그의 개혁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그랬듯이 자신이 일생을 바쳐 지키려고 했던 공산당 지배의 정치제도를 약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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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1.25
  • 저작시기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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