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족보와 위조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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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족보와 위조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족보란

2. 족보의 내용

3. 족보는 언제, 왜 만들어졌나

4.조선후기의 시대상황
■ 전체적인 상황
■ 신분제의 변화

5. 왜 족보에 가짜가 생기는가
■ 17세기 대부분은 족보 없는 평.천민
■ 조선조 이후 양반만 번성했다?
■ 누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위조하였나?
■ 양반들의 타협, 별보와 별파

6.족보와 현대사회

7.족보 위조를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인가?

본문내용

까지도 직접적인 혈연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위 씨족에 정식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별보와 별파가 가계 위조의 합법적인 수단으로 변모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1900년의 위 성씨의 족보는 그보다 74년 전에 출판된 족보에 비하여 분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같은 기간에 구성 인원이 3배 가량 증가했다는 말이 된다. 18세기까지 생존하였던 조상에 대한 분량은 1826년 족보의 40% 정도이며, 그 분량은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같은 기간 전국의 인구 증가율은 20% 내외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족보에 새로 수록된 인원의 최고 80~90%에 해당하는 3만~4만명은 가계를 위조하여 이 성씨 집안으로 행세하게 된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것은 물론 이 성씨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한국의 유명 성씨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던 것이다.
요컨대 별보에 기록된 사람 대부분은 해당 씨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해당 족보에 기록되기 위하여 증빙자료로 제시한 문서는 대부분 호적이었는데, 바로 거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경상도 노비들의 경우만 하더라도 18세기에 처음으로 K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을 당시에는 김해를 본관으로 했으나 곧이어서 남원으로 바꾸었다. 알다시피 남원 K씨 가운데는 유명한 인물이 많다. 그런데 17~19세기의 호적을 뒤적여 보면 이와 같은 예는 흔히 발견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른바 양반들의 족보에 별보나 별파로 기재되었다가 나중에 흡수 통합되었던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해당 씨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6.족보와 현대사회
족보는 단지 지나간 과거의 유물인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적지 않은 힘을 가진 존재이다. 족보가 현대에도 한국인의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족보 출판 상황에서 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 즉 1920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10년 간에 출판된 도서의 건수를 보면, 족보는 1920년에 63건, 1929년에 178건으로서, 매년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대세는 뒤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물론 현재는 출판물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에 족보가 제1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수의 족보가 출판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같이 족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이 오늘의 이 시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족보에 대한 관심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검토해 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의 하나일 것이다.
【족보의 효용】
족보(族譜)는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始祖)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이에 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 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 번 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후의 서양화와 지금의 핵가족 제도가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 이다.
【족보의 부정적인 측면】
ㅡ 족보의 대다수는 부정확한 기록일 뿐이다.
양반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족보를 오동나무 상자와 같은 특별한 함(函)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한다. 이처럼 신성한 족보인 까닭에 그 내용, 특히 가계의 계승에 관한 기록 가운데는 어떠한 거짓도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한국인의 신념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신성한 문서로까지 간주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뜻밖에도 사실과 다르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허다하게 발견되는 것이 바로 족보다. 사실만을 기록한 족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지만, 허위 사실이 특히 많이 발견되는 것은 20세기에 발간된 족보들이다. 그들 그러면 그와 같은 엉터리 족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나온 수만 권이나 되는 족보의 내용을 일일이 검토할 수 없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족보에는 가계를 위조하여 끼어 든 가짜 친족이 적게는 수천명, 많게는 수만명 이상 수록돼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ㅡ 잘못된 족보로 인한 피해
① 잘못된 족보의 정보로 인한 동성 동본 금혼법에 관한 부당성
② 부계사회의 잔재
③ 민주사회의 걸림돌
7.족보 위조를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인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을 뿐 아니라 가문의 진정한 뿌리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족보 위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족보 위조가 성행하였던 그 시대는 양반이 아니면, 문벌이 아니고서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회였다. 개인의 능력보다도 가문의 높낮이가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가짜 족보를 갖고자 했던 선조들을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또, 족보를 사고자 했던 하층민들 중에는 나면서부터 가지는 '양반'이라는 지위만 없을 뿐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서 양반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상민'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받게 되는 불이익은 경제적 풍요로움으로만 채울 수는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족보를 위조하다 들키게 되면 큰 처벌이 가해질 뿐 아니라, 호적과 족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도망.이동하여서만 가짜 족보의 양반행세를 할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족보를 위조하려고 했던 당대의 상황을 이해해보자.
또 양반과 하층민이라는 계급사이의 커다란 이질감과 차별을 상당부분 해소시켜준 것에 족보의 기여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과 효과를 통해 볼 때, 선조들의 족보 위조는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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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1.28
  • 저작시기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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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8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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