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문화 유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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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 문화 유산 답사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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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천문학은 기상변화는 물론, 농업과 여러 국사 및 인간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일찍부터 발달한 학문이었다.
고구려에는 일자, 백제에는 일관부, 신라에는 천문박사 등의 천문을 담당하는 전문 부서가 있었다. 삼국은 독자적인 천문관측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7세기 중엽 삼국을 통일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누리는 등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첨성대를 세웠다. 고구려, 백제의 과학기술이 도입된 통일신라 최고의 건축기술과 관측경험이 첨성대를 통해 표현되었다.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첨성대는 그 구조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첨성대의 기단을 정사각형으로 하고 몸체를 원형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일반인의 생각에 기반한 것이다. 높이는 30.06척(9.108m)으로 아래가 굵고 위가 가는 병 모양의 안정된 구조이다. 밑지름은 16.3척(4.93m)이고, 윗지름은 9.4척(2.85m)이다.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되어 있는데 맨 위에 놓인 정자석을 합치면 28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 29로 한 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는 가로 세로 1미터의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일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숫자는 360여개로 일년의 날수에 가깝게 하였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하지에 태양이 남중할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추게 되어 있고, 춘분·추분과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점과 지점의 측정이 가능하다.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대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高僧) 원효(元曉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신라시대의 고승)와 자장(慈藏 610-진평왕 32경∼654-태종무열왕 1경. 신라의 승려. 성은 김씨, 이름은 선종-善宗)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혜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希明 ?∼? : 신라 시대의 여류향가작가)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千手大悲)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率居 ?∼? : 통일신라시대의 화가)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 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키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和諍國師碑片),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미터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파손시켜 1915년 다시 수리를 하였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한 변 약 13미터, 높이 약 1.6미터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물개,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사자가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 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으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이 인왕상은 모두 반라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7세기 삼국시대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의 1층 네 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분황사까지 답사를 하고나니 경주를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박물관까지 답사를 하려고 하였지만, 시간이 허락해 주지를 않았다. 터미널로 와서 버스를 타고 동대구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기차는 경주를 멀리하며 떠나고 있지만, 이틀 동안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본 경주의 유적들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미처 다 보지 못한 유물들을 언젠가는 꼭 다시 한번 와서 보리라는 다짐들을 계속하게 되었다. 옛날에 왔던 경주와 지금 본 경주는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얻어지는 것들은 많은 차이가 났다. 서울에 가까워 지면서 "아는 만큼 본다."라는 유흥준의 말이 떠올랐다.
< 참고문헌>
1.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2 경주」, 돌베개, 2000
2. 윤경렬, 「겨레의 땅 부처님 땅」 , 불지사, 1993
  • 가격5,800
  • 페이지수23페이지
  • 등록일2005.04.19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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