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화국에 대한 완벽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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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3공화국에 대한 완벽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3공화국의 이해
1) 제 3공화국의 성립
2) 제 3공화국의 정치와 정부제도

3) 제 3공화국의 경제성장과 주요 정책
3) 3선 개헌
Ⅰ. 환경

1.국제적 환경
2.국내적 환경
3.체제의 성립
Ⅱ. 정치 · 행정체제

1.목표
2. 체제의 성격
3. 정부체제의 구성
4. 행정체제의 구성
Ⅲ. 체제의 동태적 과정

1. 정책과정
2. 정책내용
3. 정책과정에서 참여집단의 역할
ⅳ. 제 3공화국에 대한 평가
ⅴ. 3공화국에서의 주요사건
1. 6 ․ 3 사태

2. 4대 의혹사건
3. 한일협정반대 학생시위
4. 1·21사태

본문내용

, 결국 사태를 초래한 증권회사를 비롯하여 5,300여 명에 이르는 영세한 일반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재산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워커힐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외화 획득의 방편으로 주한 유엔군의 휴양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1961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에 워커힐호텔을 지으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호텔건립공사가 자금난에 허덕이자 정부주금(政府株金) 5억 3,590여 만원을 빌려주어 호텔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막대한 공작자금을 유용하였다. 또한 공권력을 휘둘러 교통부장관과 각 군에 여러 장비를 제공하게 하고 인력을 동원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회전당구기사건(일명 빠칭고 사건)은 군정하에서 1961년 12월 재일교포 김태준(金泰俊) 등이, 빠칭고라고 하는 도박성을 띤 회전당구기 100여 대를, 재일교포 재산을 반입하는 것으로 속여 국내에 들여온 사건이다. 그 뒤 계엄 상황하에서도 빠칭고 도박이 성행하여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영업허가를 취소하고 김태준 등을 관세법 위반으로 체포하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새나라자동차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자동차공업을 육성시킨다는 명목으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자동차 400대의 수입과 판매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수입허가 과정에서 공권력이 남용되어 횡령 등 부정행위가 행해진 사건이다. 결국 국산자동차공업의 발전은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예산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들은 군사정권이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1964년 초 제3공화국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 진상이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부정적인 정치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3. 한일협정반대 학생시위
1965년 6월 22일 한국의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사부로,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 사이에 조인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총칭입니다.
제1차 한일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의 중개로 1951년 10월 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1952년 2월 15일부터 당시 한국의 이승만 정부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 사이에 본회담이 시작되었는데 쌍방의 주장이 크게 엇갈려 4월 21일 중단되었습니다.
제2차 회담은 1953년 4월 15일에 열렸으나 평화선문제, 재일교포의 강제퇴거문제 등으로 7월 23일 다시 결렬, 10월 6일부터 재개된 제3차 회담도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 강이치로의 "일본의 36년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망언으로 10월 21일 또다시 결렬되었고, 그 후 오랫동안 중단되었습니다.
제4차 회담은 1957년 예비회담을 거쳐 1958년 4월 15일 시작되었는데, 재일교포의 북송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1960년 4·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다시 중단되었습니다.
그후 장면 내각은 한일회담 재개를 추진하여 그해 10월 25일 제5차 회담이 열렸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당시에 소련과의 냉전상태에서 동양의 두우방인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적대하는 것을 막고 소련과 중국등의 공산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막으려면 두 나라가 긴밀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나라간의 협약을 강력하게 촉구 하였습니다.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길은 일본의 산업화를 배우고 근대화를 이루려면 자금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아래
한일회담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 대일청구권문제와 평화선, 법적 지위문제가 타협점에 도달하여 메모를 교환하였습니다. 그 당시 한국의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을 계속하였으나, 한국이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 달러의 엄청난 차이 때문에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마침내 62년 11월 12일 김종필특사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의 비밀회담에서 합의된 이른바 ‘김 ·오히라 메모’를 근거로 하여 65년 6월 22일 한 ·일 기본조약의 체결과 동시에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재산청구권에 대해 일본이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간에 지불하고, 경제협력으로 정부간의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 7년 거치 20년 상환이라는 조건으로 10년간 제공하며,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 내에서는 1964년 3월 24일 학생시위에 이어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1965년 2월 20일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가 방한, 기본조약의 가조인을 함으로써 완전타결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청구권문제·어업문제·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있었다며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습니다.
4. 1·21사태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 (실미도 부대 창설의 원인)
이 사건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 당하였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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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24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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