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가다 쓰러진 거목 :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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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대를 앞서가다 쓰러진 거목 : 조봉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일제하 공산주의 독립운동
1.식민지시기 국내에서의 민족해방운동
2.해외에서의 민족운동
3.일제하 공산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Ⅲ. 조봉암의 정치노선
1. 해방직후 공산주의에서의 전향
2. 조봉암과 단독정부
3. 제헌국회에서의 활동과 초대 농림부장관
4. 제 2대 국회의원당선과 부산정치파동
5. 제 2대 대통령선거와 정치적 수난의 시작

Ⅳ. 진보당
1. 진보당 창당배경
2. 제 3대 대통령선거
3. 진보당 창당
4. 진보당 사건

Ⅴ. 결론

*조봉암의 주요 정치노선 정리
*참고문헌
*조봉암에 대하여

본문내용

비위원회로 구체화되었는데 이때 조봉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주성을 견지하여 내로는 동포상잔을 피하고 민족통일을 완수할 것이며 , 외로는 국제협조를 강조하고 특히 미, 소양국으로 하여금 마찰을 일으킬 위험있는 행위는 절대로 삼가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3월 27일자
동족상잔의 배격은 조봉암 평화통일론의 출발점이자 기본 뼈대이다. 조봉암은 1947년 5월 미소공둥위원회가 열렸을때 좌우합작노선에 서서 미소공위가 성사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분단으로 치달을때 5.10선거에 참여하였지만 구가 중심이 되어 발족된 6.1 구락부, 무소속 구락부에서 조국의 남북통일, 완전 독립을 전취할 것을 최대의 임무로 삼은 것은 김구, 김규식의 '평화통일운동'과 맥락을 같이한다.
조봉암의 평화통일 주장은 제네바회담이 열리기 전인 1954년 3월에 쓴 장문의 출사표 (우리의 당면과업)에 원숙한 형태로 드러났다. 1950년대 중반에 펼치게 디는 '제 3의 길"의 기본뼈대가 잘 집약되어있는 정치테제이다. "대공산당 투쟁이 승리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조봉암은 당시 이승만 정부가 주장하는 북진통일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방법도 있으며 오히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피력하였다.
서중석,『조봉암과 1950년대』 상 224p
조봉암의 이 주장은 1954년 4월에 열린 제네바회담의 평화통일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수 있다. 또한 통일방안을 검토해보자는 것 자체가 북진통일 외에 어떤한 다른 방안도 있을수 없다는 이승만정권에 대한 도전으로서 금기시되는 것을 깨는 효과가 있었다. 조봉암은 19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본격적으로 '평화통일론'을 제기하였다. 이 문제야말로 당시 민족의 생존권이 걸린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더 이상 미룰수 없는 과제였다. 조봉암이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높은 득표를 올린 이유중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이 '평화통일론'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수많은 민중들은 전쟁의 실체를 직시하게 되었다. 이념이 무엇이든 간에 전쟁을 통한 해결은 파국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깨달은 민중들은 이승만정권의 무력북진통일정책이나 이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야당의 통일정책에 비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민족생존권 차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느끼고 표를 던진 것으로 생각된다.
2. 민주사회주의론
조봉암은 복지사회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건설하는 방법으로 정치, 경제, 사회전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민주적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토를 통일해서 완전한 자주통일, 평화의 국가를 건설하고, 모든 사이비 민주주의를 지양하고 혁신적인 참된 민주주의를 실시해서 참으로 인민의 ·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를 실시하자는 것, 또 계획적인 경제체제를 수립해서 민족자본을 육성 동원시키고 산업을 부흥시켜서 국가의 번영을 촉구하자는 것이고 교육제도를 개혁해서 점차적으로 교육의 국가보장 제도를 실시해서 이 나라에 새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세계의 문화진운에 이바지 하자는 것입니다.
조봉암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1991 한길사 pp.257-258
조봉암이 생각하는 분배의 평등은 노동자들에게 최저생활의 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최저생활의 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을 통해 노동계급의 완전한 이익옹호를 이룩함으로써 사회적으로는 분배의 평등화가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봉암의 정치노선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폭력혁명노선을 지양하면서 정치적으로는 혁신적인 참된 민주주의를 실시하며 언론, 출판, 집회 ·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경제적으로는 계획적인 경제체제를 통한 분배의 평등화와 사회적으로는 사회보장제도와 교육의 국가보장제도의 실시를 통하여 인간의 자유와 개성이 완전히 보장되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자는 점 등에서 볼때 그는 진정한 민주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박태균, 『조봉암 연구』,창작과 비평사, 1995, 한길사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상』,1999, 역사비평사
이영석, 『죽산 조봉암; 그의 슬픈 삶과 죽음의 이야기』,1983, 원음출판사
이용희, 『한국 민족주의』, 1977, 서문당
임홍빈, 『죽산 조봉암의 죽음』
정영태, 『조봉암과 진보당』, 1991, 한길사
조용중, 『미군정하의 한국 정치현장』, 1990, 나남
자료대한민국사
http://korea.history.go.kr
조봉암 [曺奉岩, 1898~1959]
본관 창녕. 호 죽산(竹山). 인천 강화출생.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19년 3 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하여 문화부책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 건국준비위원회 노동조합 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다. 그 해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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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30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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