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배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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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배경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각 나라별 고대 고분의 비교
1. 신석기 고분.
2. 삼국시대의 고분
3. 일본의 고분
4. 이집트 고분 - 피라미드

Ⅲ. 결론

본문내용

이가 약 60m의 직사각형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복합체는 계단식 피라미드 이외에 북쪽에 장제신전, 동쪽에 왕의 파빌리온과 신전군 그리고 두 개의 궁전 등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양쪽으로 의식 행렬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6m 높이의 기둥들이 있는 긴 홀과 큰 갈대 모습을 하고 있는 기둥 주두의 형태, 파피루스 연꽃 모습의 기둥장식 등이 특징적이며 이는 고대 그리이스 고전건축을 상기시킨다. 결국 마스터바를 좀더 기념비적인 성격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 피라미드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사후세계의 신인 "카"의 영원한 존재를 기념하기 위한 의도와 미이라가 된 왕의 절대적이고 신격화된 권력을 상징하기 위한 의도가 피라미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일반형 피라미드(common pyramid)
피라미드 형태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흙으로 덮인 둔덕 모양의 초기 분묘형태에서 추출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가장 단순하면서도 고도로 발달된 추상적 형태로서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문화적 발달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기본요소들은 단순한 입방체 형태를 형성하는 선과 평탄하고 매끄러운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상적 형태는 태양신에 대한 숭배와도 밀접한 관 기자의 피라미드
계를 지니며 태양 숭배사상에 의해 피라미드의 형태가 제안되었을 수도 있다.
나일강 하구 부근, 하(下) 이집트의 기자(Giza, 지금의 카이로 부근)에 있는 3개의 연속된 피라미드(기원전 2545∼2450년)들은 이집트의 3명의 왕을 위한 것으로 왕권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 이집트의 건축적 발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전의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한 차원 발전한 형태인 기제의 피라미드는 매끈한 삼각형의 거대한 매스를 자랑하고 있으며 치밀하고 엄격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큰 것이 쿠푸왕(Khufu)의 피라미드로 높이 137m이며 길이가 가로, 세로 각각 230m, 면적은 5.3ha를 차지하고 있다.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큰 것이 모두 2백 30만개의 돌(가 2.5t)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석재들로 프랑스의 국경을 낮은 담으로 둘러쌓을 수 있을 정도라 한다. 내부의 구조 또한 대회랑, 여왕을 위한 실들, 왕의 미이라가 있는 중심지역, 의복, 음식, 제례용 용기들이 있는 창고 등 거대한 내부구조를 지니고 있다. 카프레왕(Khafre)의 피라미드는 높이 143m, 가로, 세로 각각 215m이며 멘쿠레왕(Menkure)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66.5m, 가로, 세로 각각 108.5m로서 피라미드의 외관의 형식성을 완성하고 있다. 구푸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각 변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각 변의 길이 또한 거의 같아 당시 건축, 토목공사의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 도시주거형성의 역사, 열화당, 2000 p181~182
또한 피라미드 동쪽으로 장제신전이 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 나일강까지 긴 회랑이 설치되었고 이전에는 강을 접해 신전이 건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피라미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복합체이다. 재료는 내부에 석회암을 사용하였고 표면마감은 백색 석회암을 사용하였다. 특히 백색의 석회암이 상부부터 마감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피라미드는 위에서부터 만들어졌다."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후 기자의 피라미드만큼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는 건축되지 않았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기자
Ⅲ. 결론
지금까지 선사시대 ∼ 삼국시대까지 우리 나라와 일본과 고대 근동, 이집트에 고분에 관하여 요약하고 살펴보았다.
우리 나라는 주로 신석기 시대 이후로 고분이 남아 있으며 통솔된 사회 집단이 형성된 청동기 시대부터 지배 계급의 분묘가 커지기 시작했고 특히 삼국 시대의 고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분묘에 대한 관심과 정성이 고조되어, ■■고분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지배자나 유력자들의 분묘는 자기 자신들의 힘과 당시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국 시대의 묘제를 통해 그 흐름을 정리해보면 크게 북한 지방의 돌방무덤과 남쪽 지방의 돌곽무덤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북쪽의 돌방무덤이 고구려에서 백제를 통해 점차 남쪽으로 퍼져 내려가는 형세로 되었다.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부부 합장용인 돌방무덤 형식이 단독장인 돌곽무덤 전통을 소멸시키고, 신라 통일시대 이후 한국 상류층의 기본적 묘제로 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인 것이다.
) 김문호 Ibid., p. 74
이렇게 고분은 지배층인 피장자의 정치적, 사회적 위치를 잘 나타내며 당시의 매장 관념과 함께 피장자가 속하고 있던 시대상 등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도 볼 수 있다..
즉 고분이란 것은 그저 죽은 사람의 무덤에 그치지 않고 각 시대의 역사·문화·사상 등 여러 면에 관해서 많은 연구 자료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따라서 고분 축조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고분 문화 시대의 추이와 지역 사회의 문화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고분의 대해서 공부하면서 그것의 위치, 구조, 매장방법, 부장품 등의 아직도 많은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한계와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지만, 이것을 통해서 잊어져 버리기 쉬운 우리의 역사를 한번쯤 되돌아보고, 고대 근동의 고고학의 한 부류인 이집트 피라미드에 대하여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매우 유익했던 연구 였다고 말하고 싶다.
참고문헌
백성광 "문화유산과의 산책" 맑은소리
김원룡 "한국의 고분"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1974.
손대준 "일본의 역사와 문화" 시사일본어사
김영원외, "박물관 밖의 문화유산 산책 1" 녹두 1998.
이정수외, "테마가 있는 한국문화" 선인
최무장.임연철 "고구려 벽화 고분" 신선원
김기웅 "고분" 대원사.
최승현 "신라고분연구" 일지사 1992.
강인구 "백제고분연구" 일지사 1977.
김문호 "고고학 과거로 들어가는 문" 일빛
임헌 "위대한 파라오의 이집트" 예술시대
국학자료원, 『한국사연구논선』, 1997
'한국 고고학 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5.06.30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5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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