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와 피조물의 변증법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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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피노키오'의 알레고리

피조물의 도전과 반란

'창조의 비극'으로서 문화

비극성과 인간 실존, 그리고 오늘의 문제

인간 자기 보존론'의 관점에서

본문내용

제3장 참조.
오늘날 문화 활동의 상당 부분은, 언급했듯이, '잘' 조직되어 있고, 합목적적이며, 일정한 체제 속에서 이루어진다. 조금 더 강조해서 말한다면, 지나치게 계획되어(hyper-planned)있고, 지나치게 조직되어(hyper-organized)있으며, 반드시 성과를 요구하는 목표가 있고, 체제 순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여유가 없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와 함께 각 개인의 자유의 폭도 좁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로렌츠의 입장에 빗대어 말하면, '놀 틈이 없어서' 창조성이 발현될 기회도 줄어든다고 볼 수 있다. 조금 지나치게 말하면, 상당수의 문화 활동에서 현대인들은 '노는 것'이 아니라 '놀아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차원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을 능동적으로 상호 교환하는 것이 '놀이'의 전제(前提)이고, 따라서 창조성 발현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놀이, 또는 '문화 게임'은 상당히 획일화된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열린 개체들 사이의 게임이 아니라, 마치 '열린 운동장' 에서 '획일화된 개체들이' 게임을 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여기에 '열린 사회'를 추구하는 현대 문화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구든지 오라'고 한 후, 모두 모이면 각자에게 똑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열린 놀이를 위해서는 운동장을 개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게임 참가자가 다양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각 개인이 '놀 줄 아는' 것과 함께 '놀 수 있는 상황'이 필요하다.
로렌츠도 이미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획일화된 문화 형태가 전인류를 특징지우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세계시장이라는 동일한(따라서 유일한) 장터에서, 획일화된 수단으로 획일화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며 경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것을 마치 어떤 하나의 종(種)에 속하는 동물이 자기들끼리의 닫힌 범위 안 에서(그들 사이에서는 열린 경쟁의 장이지만) 서로 획일화된(그들에게는 '균등'하게 주어진) 투쟁 수단으로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하는 것에 비유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의 인류는 어쩌면 자신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야생적 '자연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자기 보존을 위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이다.
문명 비판의 페시미즘을 한 편에 접어 놓더라도, 만일 모든 분야에서 강도 높은 획일화가 진행된다면(물론 일정 분야에선 오히려 획일적인 것이 필요하다. 한 예로 우리는 경제와 생산관리에서 '스탠다드'라는 것을 추구하며 군인들은 유니폼을 입는다), 어두운 전망을 할 수 밖에 없다. 예측 불허의 창조적 진화와 그 성과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을 피하고 더 넓은 자유를 향한 지속적 해방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창조성의 발휘를 위한 영역(예를 들면 문화 예술 영역)을 획일화의 물결에서 따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인간 자기 보존의 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놀이', '호기심', '경이감'을 바탕으로 하고, '한가로움'과 '아름다움'이 있는 창조 행위를 적극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 안에 몰이해적(沒利害的)이고 탈목적적(脫目的的)인 활동을 위한 '여유'를 놓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타산과 목적달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창조 행위의 과정에서 파생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철저한 과학적 합리성과 실리적 목표 추구 아래에서의 활동과 생산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K. Lorenz는 Homo faber로서 인간이 어떤 사용 목적으로 생산한 피조물도 Homo ludens적 창조성 덕분으로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운 형상을 지닐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합목적적인 행위와 순수 예술적 행위가 호혜성(互惠性)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아이디어는 인간이 이해타산적이고 합목적적으로 창조한 피조물과의 충돌과 갈등 사이에서 완충적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은 실존적 의미와 가치를 고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생존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에 또한 인류의 자기 보존 가능성이 달려 있는 것이다.
놀이, 호기심, 경이감(驚異感)은 각각 세 가지의 창조적 활동의 원천이자 과정이다. 놀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호기심은 '과학을 위한 과학'에서, '경이감'은 '명상을 위한 명상'에서 그러한 창조행위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그 행위 과정 자체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놀이 그 자체이고, 과학은 호기심 그 자체이며, 명상은 경이감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즉 그 자체 외의 무엇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 외의 무엇을 위해 쓰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놀이, 호기심, 경이감이 어우러져 있을 수 있듯이, 이 세 가지 활동은 설명을 위해 구분해 보는 것이지 사실 서로 혼재(混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혼재하는 것을 통틀어 '문화 놀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문화적 즐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의 '한가로움'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다. 이른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활동은 이 세상의 제약을 최소한으로 받음으로 해서 가장 창조적인 면을 드러내며,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그 자체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구를 떠나 우주의 어느 곳에 가더라도 생명체로서의 인간과 함께 하는 창조적 삶의 조건일 것이다.
이 외의 분야에서 인간이 이해타산적이고 합목적적이며, 치열한 경쟁을 해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이고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세 분야에서 인간은 순간 순간 '심혈(心血)'을 기울일 때가 있을지라도 치열(熾烈)해지지는 않는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 창조성의 반짝이는 보석같은 성과가 파생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성과가 인간이 기술적, 경제적 생산의 피조물과 일으키는 갈등에 예기치 않은 그러나 엄청난 효과를 지닌 해결의 열쇠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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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07
  • 저작시기2005.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6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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