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사형제도 이해와 성서적 고찰 반대하는 신학적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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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기

2. 사형제도에 관한 사회과학적 분석

3. 한국상황에서 살펴 본 사형제도

4. 사형제도에 대한 성서적 고찰

5.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신학적 근거

본문내용

스도의 속죄를 죽음의 증거로 내세우는 이유는 형법 안에 있는 속죄정신의 완전한 포기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죄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고유한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후 인간적인 형벌의 의미는 단지 교육적이고 사회복귀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비로운 심판의 결과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자비와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속죄관은 가해진 고통을 통해 공로를 쌓는 것으로 없어서는 안 될 응보로서 인정하는 기능을 가진다. 여기서는 공로의 개념을 실제적으로 응보의 척도로서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공로의 개념은 너무나 과중한 부담을 주게 된다. 사실 하느님은 공로에 따라 인간에게 보답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자신의 자선행위에 숨기고 있다면 이는 부당할 것이다. 그레샤케(G. Greschake)에 의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사적인 존엄 때문이 아니라, 말하자면 창조질서에 있어서 피조물에게 드러나는 당신의 영광 때문에 속죄를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당신의 개인적인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불구가 된 세상의 복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는 악인에 의해서 창조질서에서 상실된 것을 복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악한 죄를 범한 죄인이 처형되었을 때, 그는 이를 통해 속죄한 것인가? 즉 형벌의 수용과 형벌을 통한 속죄가 진실된, 그리고 마음 깊이 받아들인 화해의 행위를 의미하는가? 속죄를 위해서는 죄인이 속죄의 진정한 의미를 받아들이고 개인적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형벌이 속죄하는 것이라면 형벌은 형벌을 받은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고, 그의 잘못된 인생관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다른 모든 사람과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까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바탕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마치 정치를 통해 갈등과 문제를 제외시켜 버리는 것처럼 속죄가 자신을 소외시킨다고 생각하는 한 형 집행은 단지 의미 없는 행사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역기간 만으로는 복역자에게 아무런 도움을 못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해의 노력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화해의 노력은 보복당하지 않는 자를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희생자와 범인을 미래의 하느님 안에서 모두 의롭게 되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섭리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행된 사형에 대하여 속죄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인간의 과실은 결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복구될 수 없는 것이다. 형벌 그 자체만을 미래를 위한 법적 조치로 간주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형이상학적 속죄는 자연적인 죽음 그리고 모든 고통이지, 국가에 의해서 집행되는 형벌이나 사형이 아니다. 만약 국가형벌이 속죄개념만으로 설명된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속죄에 대한 의미를 왜곡할 뿐이다.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볼 때, 국가는 구원의 심판관인 것처럼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구원적 권한이 국가에 없기 때문이다.
5-2 형벌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로운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계획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분의 창조적 형상 능력을 반영하고 있고 또 그러기 위해 인간이 하느님께 개별적으로 대답할 능력과 의무를 지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를 해치고 그로 인해 창조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범죄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범죄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근본적으로 파괴함으로서 총채로서의 창조와 창조주까지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로서만 보는 범죄는 결코 최종적이라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이 계산된 행동으로 그 책임까지도 예상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회심할 가능성이 남아있다.
세상 안에는 하느님의 섭리와 권능이 화해와 용서의 복음을 통하여 죄와 과실 그리고 인간의 실존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순종과 죄는 인간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절망과 희망, 저주와 축복, 심판과 선택, 죄와 은총의 사이를 간다. 그러나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비의 실재화를 위한 전제조건은 악으로부터의 회개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결단이다. 예수의 설교는 회개에로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우리는 전체적인 삶의 변화와 새로운 삶의 지향을 통하여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와 참회는 죄의 용서와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한 전제조건인 것이다.
신약성서는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회개하는 삶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형벌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인이 자신의 잘못된 행위로부터 회심하고 신앙의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는 희망을 형벌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 참회의 요구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와 그 구성원 각자에게로 자신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회의 요구는 사회적 성격을 지니며, 거기에 합당한 내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하며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화해를 약속한다. 그러므로 속죄를 단순히 응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응보는 순전히 수동적으로 부과되는 처벌을 의미한다. 응보는 범행으로 인한 죄에 대한 반작용이지, 범죄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것도 아니요 손상된 가치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도 아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의미에서 속죄는 화해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속죄하는 사람은 단절된 세상과의 관계를 다시 맺어야 하며, 사회로부터 다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로 죄에 부합하는 개념은 응보가 아니라 속죄가 되는 것이다. 죄는 보상이나 보복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죄는 화해와 속죄를 필요로 하며 죄인이 다시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범죄자가 사회와 단절된 결합을 다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사회는 범죄자가 다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키워드

사회문제,   종교,   비평,   비판,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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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10.04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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