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전기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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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중앙지배세력의 형성

2. 지배세력의 성격

3. 지배세력의 추이와 동향

본문내용

言을 믿고 자신의 딸을 시켜 인종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
이런 가운데 이자겸의 아들인 李之彦의 奴와 척준경의 노가 다툰 것이 계기가 되어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에 틈이 생김. 그러자 인종은 內醫 崔思全을 통하여 척준경을 회유. 결국 인종의 密旨를 받은 척준경은 이공수와 의논하여 이자겸을 체포. 그후 이자겸과 그의 처 최씨 및 아들 之允은 靈光으로 유배되었고, 그 일파인 之美·義莊·公儀·之元 등도 협주(陜川)·진도·거제도·금주 등지로 유배됨. 이자겸은 결국 영광에서 죽고 척준경도 1127년에 정지상의 상소로 암타도로 유배되었다가 곡주(谷山)에서 사망.
이자겸의 난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내부적인 정국의 혼란상은 계속. 핵심적인 지배세력의 위치도 교체. 즉 인주 이씨 세력은 쇠퇴하고 金富佾·金富軾 등의 경주 김씨 일파가 세력 잡음. 또 이자겸 난의 과정에서 불타버린 궁궐과 살육전은 개경의 민심을 흉흉하게. 여기에 대외적인 문제까지 대두. 즉 阿骨打가 여진세력을 통합하여 大金國을 세우고 글을 보내왔던 것. 이 글에서 자신을 형이라 칭하고 고려왕을 아우라 하여 고려를 모멸. 이어 금이 거란을 멸한 후에는 고려에게 臣禮를 요구.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김부식 일파의 견해에 따라 금에게 ‘표를 올려 신하를 칭하던’(上表稱臣) 상황.
이런 가운데 칭제건원·금국정벌과 더불어 서경천도론 대두. 이들은 대부분 신흥관료들로 정지상·김안·문공인 등. 묘청·백수한 등도 중요인물. 묘청·백수한 등은 음양비설로써 무리들을 현혹시켰고 여기에 정지상·김안·홍이서·이중부·문공인·임경청 등도 동조. 그들은 개경의 基業이 쇠퇴하였으므로 서경의 林原驛地에 대화궁을 짓고 천도하면 금국이 스스로 항복해올 것이라 주장. 여기에 매료된 인종은 마침내 서경에 새로운 궁전을 짓게 함. 1129년(인종 7)에 신궁이 완성되자 여기에 행차하여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을 논의. 그러나 임원애·이지저 등의 반대가 잇따르자 묘청 일파는 떡 속에 기름을 넣어 대동강물에 가라앉히고 神龍이 침을 토하는 瑞氣라는 조작극을 만들어내기도. 인종도 이들의 말에 회의를 품고 듣지 않음. 그러자 1135년(인종 13) 묘청은 分司侍郞 趙匡·병부상서 유참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반란 일으킴. 국호를 大爲, 연호를 天開, 군대를 天遣忠義軍이라 칭함.
이에 인종은 김부식의 청에 따라 개경에 있던 정지상·김안·백수한 등을 제거하고 묘청을 토벌하도록 함. 서경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묘청의 난은 1136년(인종 14) 2월에 가서야 진압. 이 묘청 난은 중앙문벌귀족 대 지방신진관료세력(서경천도파)과의 대립·투쟁이라는 성격을 내포. 여기에서 후자가 패함으로써 중앙문벌귀족세력은 더욱 세력이 커지게 됨. 결국 중앙에 진출한 문벌귀족세력은 그들의 지위와 신분을 세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순이 노출. 그것이 초기에는 왕위쟁탈전의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후기에는 이자겸이나 묘청 등의 반란으로 표출. 결국 그러한 모순이 개혁되지 않고 지속되자 武臣亂이라는 파행적인 형태로 역사가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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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02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8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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