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일생과 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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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폴레옹 일생과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나 폴 레 옹
1.성장
2.프랑스혁명
3.제1집권에서 황제로
4.유럽정복
5.몰락

나폴레옹전쟁
1차~7차

1. 대프랑스동맹
나폴레옹의 주요전투
1. 이집트원정
2. 아부키르전투 (Battle of Aboukir)
3. 마렝고 전투 (Battle of Marengo)
4. 트라팔가해전 (Battle of Trafalgar)
5. 아우스터리츠 전투 (Battle of Austerlitz)
6. 예나 전투 (Battle of Jena)
7. 아일라우 전투 (Battle of Eylau)
8. 반도전쟁 (半島戰爭 Peninsular War)
8. 바그람 전투 (Battle of Wagram)
9. 모스크바원정
10. 보로디노 전투 (Battle of Borodino)
11. 라이프치히 전투 (Battle of Leipzig)
12.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

본문내용

명의 근위병과 1만 명의 신참군대 파견을 거부했다. 쿠투조프가 이미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다 투입하여 사실 나폴레옹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기회를 잃었다. 오후가 지나면서 양측 군대는 기진맥진해졌고 전투는 포격전으로 접어들어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쿠투조프는 밤중에 후퇴했고 나폴레옹은 1주일 뒤 아무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러시아군은 제2군사령관인 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 공(公)을 비롯해 약 4만 5,000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프랑스군은 3만명을 잃었다
11. 라이프치히 전투 (Battle of Leipzig)
명 Battle of the Nations. 독일과 폴란드에 남아 있던 프랑스 병력을 완전히 격파시킴으로써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전투(1813. 10. 16-19). 약 18만 5,000명에 달하는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및 기타 군인들과 약 32만 명의 동맹군이 작센 지방 라이프치히에서 교전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스웨덴 군대로 이루어진 동맹군은 각각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 게프하르트 레베레흐트 블뤼허 장군, 레온티 레온티에비치 베니히센 장군, 스웨덴 왕세자 요한 베르나도트의 지휘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에서 퇴각한 후, 1813년 독일에서 새로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베를린 점령에 실패하고 엘베 강 서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동맹군이 라이프치히를 통과하는 나폴레옹의 병참선을 위협하자 그는 그 도시에 병력을 집결시켜야만 했다. 10월 16일에 남쪽에서 슈바르첸베르크가 이끄는 7만 8,000여 명의 부대의 공격과 북쪽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5만 4,000여 명의 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는 있었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했다. 17일 전투가 잠시 멈추었을 때 베니히센과 베르나도트의 부대가 도착해서 그를 포위한 군대수는 증가했다.
18일 30만 명 이상의 동맹군이 공격을 위해 라이프치히 주변에 모였다. 9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프랑스군은 도시 외곽지역으로 몰렸고 19일 오전 2시 나폴레옹은 엘스터 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모두가 무사히 건넜으나 동맹군의 공격 위험도 없고 아직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로 붐비고 있던 때에, 놀란 하사 1명이 다리를 폭파시켰다. 이 폭파로 인해 3만 명의 후위군(後衛軍)과 부상군인들이 라이프치히에 갇혔고 이튿날 모두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3만 8,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동맹군측은 총 5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나폴레옹 전쟁(1800-15)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에 속하는 이 전투로 라인 강 동부의 프랑스 제국은 붕괴되었다.
12.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
나폴레옹이 최후의 패배를 겪은 전투(1815. 6. 18). 이로써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이 끝났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복귀한 백일천하 때 워털루(브뤼셀에서 15㎞ 남쪽에 있음) 남쪽 5㎞ 지점에서 나폴레옹의 7만 2,000명 병력과 웰링턴 공작의 동맹군 6만 8,000명(영국·네덜란드·벨기에·독일 군대) 및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주력 부대인 약 4만 5,000명의 프로이센군 사이에 벌어졌다. 나폴레옹군 원수인 미셸 네와 에마뉘엘 드 그루시는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6월 16일 워털루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웰링턴을 카트르브라에 묶어둔 후 적이 분산되어 있을 때 공격해 섬멸하는 데 실패했다. 나폴레옹의 총병력 10만 5,000명 중 약 1/3에 해당 3만 3,000명을 거느린 그루시는 뒤늦게 블뤼허를 추격했다. 6월 18일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블뤼허 후위군 1만 7,000명의 저지를 받았으며 그동안 블뤼허의 주력부대는 위기를 벗어나 웰링턴 군대와 다시 합류해 13㎞ 남서쪽에 있는 워털루에서 전투의 대세를 바꾸어놓았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아침에 웰링턴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던 것을 땅이 마르는 정오로 연기하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는데, 바로 이 때문에 블뤼허 군대는 워털루에 도착해 웰링턴 군대를 지원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오후 6시에 이미 4차례에 걸쳐 프랑스군은 동맹군 중심부를 약화시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사이에 전혀 손발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또다른 전투가 벌어졌는데 여기서도 프랑스 군대는 블뤼허 군대의 카를 폰 뷜로 군단 소속인 3만 명의 프로이센군을 맞아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은 워털루에 당도해 나폴레옹군의 동쪽에서 압력을 가해왔다. 프로이센 병력이 후미로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로보 백작 조르주 무통이 이끄는 부대를 이동시키고 웰링턴 군대를 상대하던 주력 부대에서 몇 개의 근위대대를 이동시켜야 했다. 마침내 오후 6시 네가 보병·기병 및 포병 합동공격을 개시해 동맹군 전선 중앙의 한 농가인 라에생트를 함락했다. 프랑스 포병들은 동맹군 중심부에 포격을 시작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웰링턴 군대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질 수도 있었으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측면공격을 막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네이의 보병 증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후 7시가 지나 측면을 안전하게 하고 나서야 나폴레옹은 근위대 몇 대대를 네이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미 웰링턴은 폰 차이텐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의 지원을 받아 방어태세를 재정비한 뒤였다. 네이는 근위대 일부 병력과 다른 몇 개 부대를 지휘해 연합군에 대한 최후 공격에 나섰다. 빽빽이 늘어섰던 근위대 보병은 동맹군 보병의 화력에 밀려 뿔뿔이 흩어졌다.
동맹군의 총진군이 시작되었고 동쪽에서는 프로이센군이 공격을 개시한지 15분 만인 오후 8시에 근위대가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공포에 휩싸여 이리저리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나폴레옹 군대 중 2만 5,000명이 사상당하고, 9,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웰링턴 군대는 1만 5,000명, 블뤼허 병력은 약 8,000명이 사상당했다. 4일 후 나폴레옹은 2번째로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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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1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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