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의 혁명가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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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혈의 혁명가 간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머리말

Ⅱ. 본론
1. 간디가 태어난 인도의 정세
☺간디의 나라 인도
☺인도의 적
2. 어린 시절의 간디
☺위대한 첫발
☺소년 간디가 커 가다.
3. 간디의 투쟁과 승리
☺‘인종차별법’에 대항하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샤타크라하
☺농민들의 승리
4. 고통 받는 간디..안식으로
☺죽음의 단식
☺독립은 되었으나

Ⅲ. 결론
☞꼬리말
☺느낀 점

본문내용

독립이 되면 힌두교 신자들 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회교신자들은 다시 노예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이 인도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여기저기서 회교 신자들이 힌두교 사원을 습격하고, 힌두교 지도자들을 죽였다. 그러자 힌두교 신자들도 회교 사원에 불을 질러 보복을 했다. 나라 안은 갑자기 인도인들끼리의 싸움으로 시끄러워졌다. 봄베이, 캘커타, 마드라스 등지에서 닷새 동안 5천명 이상이 죽어갔다.
1947년 2월, 새로 인도 총독이 된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영국이 8월에 완전히 인도를 떠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지나는 인도 국민의회에서 만일 파키스탄을 회교 신자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시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의회는 지나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도의 북쪽 두 지방이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종교분쟁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독립일이틀 전인 8월 13일, 간디는 폭동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혀 보려고 캘커타로 갔다. 그러나 힌두교 신자들 가운데도 이제는 간디를 비난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가 묵고 있는 한 회교 신자의 집에 힌두교 폭도들이 몰려와 “간디를 죽여라!”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간디는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이 악마적인 종교 싸움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78세의 나이에 그는 단식을 선포했던 것이다. 간디가 단식에 들어가자, 양쪽 지도자들은 그에게 찾아왔다. 힌두교 신자들은 사랑하는 지도자가 죽을까 봐 두려워했고, 회교 신자들은 자기네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단식 나흘째 되는 날 싸움은 중단되고, 두 종교의 지도자들은 악수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간디가 살아나자 폭동과 살인은 계속되었다. 간디는 자신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으로 가슴이 아팠다. 마침내 1948년 1월 13일 79세의 나이로 간디는 마지막 단식에 들어갔다. 메마른 몸뚱이 하나로, 온 나라를 삼키려는 분노와 증오를 막아보려는 간디의 모습은 참으로 거룩했다. 간디는 방송으로 인도 국민에게 호소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한 민족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간디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쉬지 않고 간디의 사그라지고 있는 목숨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제 간디는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온몸에 힘이 빠졌다. 간디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두 종교의 신자들은 다시 화해를 했다. 힌두교 지도자들과 회교 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간디의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1월 18일, 간디는 다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일어났다. 간디는 건강을 되찾는 대로 파키스탄 까지 평화를 위한 행진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 무렵 간디는 델리에 있는 한 친구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1월 20일, 간디가 정원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을 때 폭탄이 터졌다. 다행히 간디는 다치지 않았지만, 폭탄을 던진 청년은 그 자리에서 잡혔다. 그는 회교 신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인도의 넓은 땅을 그들에게 나눠주려는 간디를 없애기도 결심한 힌두교 신자였다. 간디는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손녀딸에게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총에 맞아 죽는다 해도, 그 순간 나는 웃으며 죽을 것이다. 넌 눈물 한 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만일 어떤 총알이 내 가슴에 박히는 순간 내가 다만 입술로 라마(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거든, 내가 진짜로 마하트마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로부터 열흘 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저녁 기도를 하러 정원에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때, 몰려든 군중 사이로 한 힌두교 청년이 나오더니 간디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맨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일어나는 길로 가슴에서 권총을 꺼내어, 간디의 가슴에 세발을 차례대로 쐈다. 간디는 바닥으로 쓰러지며 신음하듯 마지막 한 마디를 토했다. “하이, 라마!(오! 하느님!)”
Ⅲ. 결론
☞꼬리말
지금까지 간디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간디의 투쟁과 승리, 그리고 간디의 죽음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간디도 어릴 때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간디를 성자라 불리도록 바꾸어 놓았을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나는 확실히 “무엇이 이렇게 바꾸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건 하나하나를 읽으며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간디는 진실 된 정의로써 마음먹은 것을 행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그렇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다른 점이었다. 이 책을 계기로 조금씩 나도 변화를 해갔으면 한다.
느낀 점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싸움이었다. 2억 5천이나 되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자기 발로 감옥에 들어가고 매를 맞으며 죽어 갔다.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사무실도 없고, 군대도 없었다. 50킬로그램이 될까 말까 한 몸에다가 집에서 짠 무명으로 옷을 지어 걸쳤는데 그것이 갑옷이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혼자서는 아무도 가질 수 없고, 또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진리’라는 무기로 그를 따르는 열렬한 용사들과 함께, 그때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였던 대영 제국(영국)에 맞서 비폭력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겼다.
마하트마 간디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기독교인이며 힌두교 인이고, 회교도이며 유대교인입니다.”라고 했다. 간디가 지니고 있었던 물건이란, 손수 지어 입은 무명옷과 안경, 그리고 시계뿐이었다. 때로는 맨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음식은 어린 아이가 먹는 만큼만 먹었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하의 인도에서 태어나 교육을 영국에서 받았다. 그가 이 땅에 태어나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깊이 깨닫게 된 것은 남아프리카에 가서 살 때였다. 간디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모든 습관과 법률에 대항했다. 무슨 높은 자리에 앉거나, 유명한 사람이 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만 그의 양심이 그렇게 시켰던 것이고, 그가 자기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던 ‘위대한 진리’가 그렇게 시켰던 것이다.
‘위대한 진리’, 이것이 간디가 무혈의 혁명가로 불릴 수 있었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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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27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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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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