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현대사회]자살 문제에 대한 종교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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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와 현대사회]자살 문제에 대한 종교적 접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자살문제의 현황
2. 자살의 정의 및 요인
3. 자살의 유형
4. 자살문제의 해결방안
5. 자살에 대한 종교적 접근

Ⅲ. 결론

본문내용

행하기까지 약 1주일에서 1개월정도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이들은 자살의 전조증상을 보임으로써 주변사람들에게 마지막 도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살의 조기경보 신호를 빨리 읽어내야 한다.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자살의 전조신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자살하겠다는 이야기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다.
갑자기 사찰이나 교회를 찾는다.
몸이 크게 불편하지도 않으면서 의사를 찾아가 아프다고 이야기한다.
평소 아끼던 물건들을 스스럼없이 남에게 주거나 사진 등을 정리한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이 숙면을 취하거나, 숙면을 취하던 사람이 잠을 못 자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식사량이 줄어든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뜬금 없이 전화해 ‘잘 지내’ ‘그동안 고마웠어’등의 말을 한다.
유언을 써 두는 등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듯한 행동을 한다.
특히 근래 가족친지가 사망했거나, 청소년의 경우 동일시하는 인물이 사망한 경우, 평소 우울증상이 있는 경우, 평소 알코올로 인한 정신 건강문제가 있는 경우, 가족중에 자살자가 있는 경우에는 ‘자살 고위험군’에 속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렇듯 우리는 평소에 조금만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나 역시 공범자라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며, 내가 속한 공동체를 정겹고 신뢰할 만하고 서로에게 책임지며 돌보는 보살핌의 공동체로 변화시켜 나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관심을 갖고서 남을 수용해하는 ‘창문 열기’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 이렇게 남을 위해 나에게 있는 무언가를 나누고 베푸는 행동을 가리켜 기독교에서는 ‘섬김(servise)'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보시(布施)‘라고 한다.
비록 작은 실천일지 몰라도, 생활 속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베품이 결국 우리 사회를 서서히 ‘살 맛 나는’곳으로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5. 자살에 대한 종교적 접근
앞에서 ‘자살’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으로 접근해 봤다. 그렇지만 자살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측면을 알아보기 전에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의 말에 한번 귀기울여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슈바이처는 인간을 “살고자 하는 생명 한가운데 있는, 삶에의 의지를 지닌 생명”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사상은 어떤 종교적 틀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사는 것(生)이 공 하늘의 명령(命)임을, 그리하여 누구도 자/타의 생명을 해쳐서는 아니 됨을 깨닫게 한다.
불교의 경우 석가모니는 성불(成佛)의 목표는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 삶에 대한 사랑이나 증오가 아니며, 자살은 이생의 악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이 불교는 자살을 금하는 입장으로서 ‘불상생(不殺生)’의 교리를 폭넓게 실천하는 자비의 윤리 위에 터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기독교는 자살과 관련하여 다소 복잡한 길을 걸어왔다. 기독교는 본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종교로 출발했다. 이러한 박해의 역사를 초기 기독교는 ‘순교’로 승화시키면서 정착했는데, 이러한 뜻이 확대, 왜곡되어 순교를 자살로 잘못 해석하여 순교자가 되기 위해 자살을 하는 광신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 숭배를 규탄하고 자살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이라 규정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자를 정신이상자 또는 악마에게 홀린 자라고 말했지만 성서 어디에도 자살자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발언이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자살이 칭송받을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자살자에게 영혼의 안식을, 자살기도자에게 심신의 평안을 빌어주면서,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한 우리의 무지와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한 우리의 무관심을 반성해야 한다.
본래 하나님의 마음은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꽃 한 송이까지도’돌보시려 한다. 이러한 마을을 성서는 ‘연민’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마치 어미 닭이 새끼를 그 날개 아래 품어주듯이, 지상의 가장 작은 생명 하나도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자살을 꿈꾸는 자들이여, 당신이 살아있음에 당신보다 더 감동 받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보아라!! 하나님은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결코 죽을 이유가 없다고 말씀 하셨다.
Ⅲ.결론
현재의 심각성이 날로 깊어가는 자살문제는 이전의 불균형적인 사회발달로 인해 발생된 많은 사회문제들과 사회 전반적인 생명경시적인 흐름에서 그 원인을 엿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존의 다른 사회문제들에 대한 부수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살의 정의를 알고, 자살의 원인을 분석하여, 자살의 예방법을 알아봤으며, 또한 자살을 종교적 차원에서도 살펴보았다.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자살문제는 다른 사회문제와는 달리 치료란 거의 불가능하다. 치료를 할 수 있는 경우는 자살이 실패로 끝난 경우에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이웃사랑뿐만이 아니라 건강한 자기 사랑 또한 하나님 사랑의 밑거름이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자살을 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또한 자살의 가장 큰 예방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옆집에 홀로 사는 노인은 없는가! 뒷집에 어린 청소년이 집안을 혼자 꾸리진 않는가! 우리 주변을 살피는 것 이야말로 가장 큰 예방임을 배웠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우리'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안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살은 결코 문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다. 자살에 이르도록 만든 그 원인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도록 자극하고 초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소중한 생명, 우리 모두가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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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24
  • 저작시기2006.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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