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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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론

1. 성균관의 학규와 유생생활

2.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

(1) 유생의 조직
(2) 재회
(3) 장의 / 색장
(4) 성균관 유생들의 조직적 의사표현
① 유소
② 권당
③ 공관
(5) 유벌

Ⅲ. 맺음말

본문내용

뒤에 문정공 송시열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태학생이 정인홍을 삭제함에 광해가 크게 노하였지만 그러나 죄를 주지는 아니하였고, 이위경(李偉卿)의 흉소(凶疏)에 미쳐서 4관(史館)이 정거를 하였으나 광해가 풀기를 강요하지 못하였다. 대개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사기(士氣)를 배양하였기 때문에 비록 혼조(昏朝)에 있어서도 힘으로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교집록(受敎輯錄)』에서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유벌을 받은 사람은 정시, 알성시를 논할 것 없이 과거에 응시를 허가하지 않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하고, 비록 합격을 하였다 하더라도 뽑아내 버리고 이어 죄를 논하라고 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서 또한 비록 알성시,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하여도 유벌을 받은 사람에게는 응시를 허가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듯 유벌을 받은 자들은 그 죄가 풀릴 때까지 과거에 응시를 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선비로서의 자격박탈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유학자로서의 학업의 길이 막히는 치욕을 맛보게 되는 일이었다. 또한 앞서 제시한 유벌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설사 유벌의 시행에 있어 왕의 제재가 있다 하더라도 유생들은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자치적인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활동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장의와 색장을 선출하고 자치 회의기구인 재회를 통해 내, 외부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유소, 권당, 공관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또한 유교적 이념에 위배된 자, 선비로서의 소양을 저버린 자들은 유벌을 통하여 자치적으로 처벌을 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알아본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활동, 특히 재회는 오늘날의 학생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활동에 비하여 오늘날 학생회 학생들의 자치활동은 그 본래의 목적과 성격 면에서 크게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학생회는 감히 학생들의 자치회의 기구라 할 수 없을 만큼 타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학생회를 조선시대 성균관의 재회에 견주려면, 점점 잃어가고 있는 학생들만의 자치성을 찾기 위하여 그 방안을 모색하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으로서,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 갈 인재의 양성, 풍속의 교화 등으로 이상 사회 건설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의 교육 목적과 이념을 이제는 우리 모두가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參 考 文 獻>
태학지 번역 사업회, <<太學志>> 국역본 上, 제 6권, 成均館, 1994
이민홍, <<조선조 성균관 교원과 태학생의 생활상>> 尹, <<泮中雜詠>> 완역본, 성 균관대학교 출판부, 1999
정낙찬, 이동기, 채휘균, <<한국의 전통교육>>,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0
최완기, <<한국의 전통교육>>,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장덕삼, <<한국교육사>>, 동문사, 2003
윤완, <<한국 교육사의 이해>>, 원미사, 2002

키워드

조선,   성균관,   유생,   권당,   장의,   재회,   공관,   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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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6.05.19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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