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십자군전쟁과 회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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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시대의 십자군전쟁과 회의주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글
1-1. 중세의 특징과중세의 쇠퇴과정

2. 십자군 전쟁
2-1. 십자군 전쟁의 배경
2-2. 십자군 전쟁의 경과
2-3. 십자군 운동이 중세 사회에 미친 영향 및 결과
2-4. 흑사병이 중세 사회에 미친 영향 및 결과
2-5. 중세의 붕괴

3. 르네상스
3-1. 르네상스의 탄생과 특징
3-2.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유럽 전역의 르네상스

4. 회의주의
4-1. 회의주의란
4-2. 중세와 근대 사이에서 나타난 회의주의
4-2-1. 예술
4-2-2. 종교
4-2-3. 생활

5. 맺음말 -십자군 운동과 회의주의의 결론

본문내용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단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존 위클리프였는데, 옥스퍼드 신학자였던 그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정치적 기반을 공격했다. 특히 개인적 선행이 아닌 신성한 예정에 의한 구원과 면죄부의 무용성을 주장했다.
4-2-3. 생활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약해지거나 변형되었으며, 사람들은 대체로 회의적이고 참을성이 없어졌다. 그것은 근대적이고 냉정하며 침착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자신이 찬미하는 것을 태우고자 하는 전체 본성의 격렬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한스 바론(Hans Baron)은 이와 같은 사회 전반을 “14세기 중반의 끔찍한 전염병 이후 인간을 사로잡은 비관주의와 삶의 포기”라고 설명한다. 개개인의 우울증이 사회적으로는 극도의 불확실성과 근심을 심화시켰다.
당대 연대기에는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이후 모든 종류의 악덕이 가득하고 타락했다는 비난이 가득하다. 범죄율이 솟아올랐으며, 신성모독이 흔해졌다. 성 윤리의 규범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삶에서 금전 추구가 가장 중요시 되었다. 여성 의복 패션 또한 규범이 약해져갔다. 당대 영국의 시인 랭런드가 그렇게 많은 악덕이 ‘페스트 이후’ 생겼다고 추정했는데 그 시대의 모든 도덕가들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에 부모를 잃은 고아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예가 더 많아졌고, 심지어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었다. 온갖 범죄에 대한 기소와 유죄 확정의 사례도 상당히 증가했다.
5. 맺음말 -십자군 운동과 회의주의의 결론
십자군 운동과 흑사병을 통해서 유럽사회에는 회의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게 되었다. 기존의 철학과는 다른 회의주의로 인해 사회와 경제, 개인들은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다. 가장 괄목할 만한 부분은 개인의 출현이 가능해진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의 근대사에서 인간이 자기를 자유로운 주체로서 인식해가는 과정을 돌이켜보면 처음에 사람들은 자기를 어떤 집합의 일원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으로서 인식함으로써 근대의 문을 열게 된다. 서양 중세는 근대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통일된 질서가 지배하던 시대였으므로 하나의 종교가 천 년 동안이나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에 개인은 언제나 전체의 일원이었다. 개인은 작게는 가족의 일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고착된 신분질서에 매여 있고, 경제적으로는 땅에 매여 있는 존재였다. 그런 사회에서 개인의 삶은 언제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는 그런 중세적 총체성이 해체되면서 찾아왔다. 십자군전쟁은 자급자족적 장원경제를 해체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그렇게 시작된 분열은 종교개혁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게다가 지리상의 발견과 증대되는 과학적 인식은 이전까지 사람들이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왔던 세계상을 파괴해버렸다. 근대 초기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우주가 무한한 공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상이었다. ‘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하루 아침에 거짓이 되어버리는 시대에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중세의 익숙하고 친숙했던 세계는 이제 낯설고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아무 것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끼며, 혼자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근대적인 자기인식의 시작이었다. 이런 정황은 우리가 경험했던 근대의 시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인 상황은 물론 달랐지만 우리 역시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을 경험하면서 근대화의 길에 들어섰으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낯설음 속에서 ‘자아’에 눈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외로이 혼자라고 느꼈을 때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우리는 악착같이 봉건적 공동체의 낡은 끈을 부여잡고 그에 매달림으로써 근대인의 고독을 치유하려고 하였다. 봉건적 혈연의 결속이 해체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더욱더 집요하게 가족 이기주의의 울타리 속으로 숨어들었다.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과거의 씨족 문중이 해체되자 우리는 학벌을 현대판 문중으로 삼아 그 그늘에 자기를 맡겼다. 민주주의적인 정치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우리는 지역감정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여 땅에 자기를 얽어맸고, 세상은 우리에게 평등한 만남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나이와 성별, 재산과 직위를 통해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을 만들고 그런 서열과 계급적 질서를 통해 개인을 밖으로부터 규정하려 하였다. 그것은 나이가 들었어도 젖을 떼기 싫어 막무가내로 엄마 품을 파고드는 철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양의 근대는 이 점에서 우리와 달랐다. 그들을 모든 사람이 세계 내에서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나는 가족의 일원이기 전에, 내가 사는 지역의 주민이기 전에, 내가 일하는 직장의 노동자이기 전에 그리고 내가 속한 나라의 국민이기 전에, 아니 더 나아가 생물학적인 종으로서 인간이기 전에 나는 단적으로 ‘나’일 뿐이라는 자각이 근대적 자기인식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자기인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으로 변모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를 타율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모든 외적 권위에 맞서 자기의 존재와 삶을 오로지 자기 스스로 규정하고 형성하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주체로서 살기 위한 투쟁의 첫걸음은 개인이 자기를 모든 종류의 공동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학연에도, 지연에도, 혈연에도 기대지도 않고 구속받지도 않는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세상에 우뚝 서는 것, 그것이 서양에서 근대인들이 선택한 시대적 이념이었다.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했던 인간이 하나의 개인으로 출현하게 이끌어준 것 중 하나인 회의주의는 자신을 삶을 통찰하게 해 주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고 자아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회의주의의 철학이념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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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30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7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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