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설화와 고구려 건국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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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주몽설화와 고구려 건국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들어가며

2.주몽설화
(1) 삼국사기의 기록
(2) 삼국유사의 기록
(3) 이규보의 동명왕편의 기록

3. 주몽설화의 특징

4. 주몽의 개국과 치적

5. 주몽설화 관련기록

6. 고구려의 기원
(1) 지리적 환경
(2) 나(那)집단의 성장
(3) 현토군의 설치
(4) 고구려족의 저항
(5) 계루부의 대두
(6) 부체제(部體制)의 성립

본문내용

집중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 사실은 주몽집단이 (북)부여에서 이주해 왔다는 설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말한다.
주몽 설화는 허구이며 4세기 이후 고구려 왕실이 건국 전승을 만들면서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 즉 한 갈래라는 고구려의 옛 전승이 있음을 기술하였다. 이는 곧 3세기 초 이전부터 주몽설화와 같은 부류의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5세기 후반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에서 주몽 집단이 대두한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이주와 급속한 정복보다 선주민 집단과 융합하면서 서서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이 압록강 중류 지역에 부여의 묘제인 석관묘나 토광묘가 확인되지 않는 이유로 보인다. 즉 계루집단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주해 기존의 ‘나’집단들과 큰 단절이 없이 상호 융합되어 갔고, 이어 기원 전후 무렵 연맹체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무렵 고구려의 군장이 ‘추(鄒)’였다고 중국측 기록에서 전해지는데, 이 사람이 주몽이었던 것 같다. 주몽설화는 서서히 진행되었던 계루부 왕실의 대두과정을 뒷날 압축해 주몽 당대에 모두 이루어진 일인 것처럼 설화화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계루부 왕실의 흥기는 늦어도 서기전 2세기 이래 압록강 중류 지역 일대에서 진행된 ‘나’집단들의 성장과 정치적 움직임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송양집단에서 주몽집단으로의 교체, 즉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는 어디까지나 연맹체장의 교체에 불과한 것이다. 고구려족 역사 전체를 볼 때 그것은 연속선상에서 파악된다. 고구려 말기에 전해지던 비기(煉記)에 고구려가 900년간 지속되었다는 설이나 문무왕이 안승(安勝)에게 내린 책봉문에서 고구려국의 수명이 800년간 지속되었다는 표현 등이 나온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계루집단이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 이후에도 고구려족 전체를 통합하는 강력한 국가조직은 확립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사회가 안고 있는 공동체적 유제와 ‘나’집단들간의 갈등, 그 틈을 이용해 들어오는 한군현의 힘에 의해 상당 기간 저지되었다. 서기전 75년 이후 한은 고구려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를 다시 도모하면 전체 고구려족의 공동전선이 형성될까 봐 간접적으로 통제하였다. 한군현은 때로는 물자나 작위(爵位)를 주고 때로는 직접적인 무력침공을 해 고구려의 내적 통합력의 성숙을 저지하고, 각 집단별로 개별적인 관계를 맺어 분열, 회유하였다.
그에 따라 현토군의 퇴축 이후에도 상당 기간 중국 군현의 영향력이 고구려 사회에 미쳤다. 서기 10년경 북방 유목종족을 공격하기 위해 왕망(王莽)이 내키지 않아하는 고구려병을 강제로 동원했던 사실은 중국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서기 47년 1만여 명을 이끈 잠지락(蠶支落)의 족장 대승(戴升)이 낙랑군에 투항한 사례는 한군현의 분열 정책에 따라 고구려 연맹체 내부에서 일어난 원심 분리현상의 한 예이다.
이어 1세기 후반 모본왕이 피살되는 등 고구려 내부에서는 장기간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던 같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고구려 사회 내에서는 한편으로는 외세의 작용력을 극복하고 한편으로는 ‘나’집단간의 통합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6) 부체제(部體制)의 성립
대체로 1세기 종반 2세기 초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포괄하는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고대 국가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는 대내적으로는 그간 진행되어 온 ‘나’집단들 상호간의 통합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나’집단들은 유력한 ‘나’를 중심으로 서로 병탄해 나가면서, 보다 큰 단위세 력을 형성해 갔다.
계루집단에 의한 조나(藻那)·주나(朱那) 및 개마국의 병탄이나 1만여 명의 부여계 집단이 연나(椽那)로 합병된 사실들은 그러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이들 다수의 ‘나’들은 점차 다섯 개의 유력한 ‘나’로 통합되고, 다섯의 ‘나’가 계루집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고구려왕을 정점으로 강력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아래 귀속되어졌다. 이에 고구려의 5부가 확립되었다.
각 부(部)는 대내적인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대외적인 무역권·외교권 및 전쟁권은 박탈당하였다. 나아가 각 부가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인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각 부내의 동향까지 왕실에서 통제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대외적으로 중국 군현과의 교섭은 중앙정부에서만 취급해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현토군과의 경계에 세운 책구루(岫溝鷺)는 그 교역 지점이었다.
이는 곧 중국 군현의 분열·회유책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한군현의 간접적인 영향력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나아가 태조왕 때부터 왕의 지휘하에 중국 군현에 대한 조직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옥저 방면 등에 대한 정복 활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1세기 후반의 정치적 혼란 상태를 극복하고 태조왕이 강력한 집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계루집단 내에서도 각 친족 집단들간에 격렬한 상쟁이 있었던 것 같다.
태조왕 이전의 고구려왕들의 성은 해씨(解氏)였는 데 비해, 태조왕 이후에는 고씨(高氏)라 칭하였다. 태조왕과 이전의 모본왕(慕本王)이 사촌간이라고 했지만, 태조왕의 재위기간이나 수명 등을 고려할 때 양자는 실제 계보상에서 직접적인 계승관계에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태조왕계는 종전의 계루부 왕실의 방계 집단이거나 또는 직접적인 혈연 관계가 없는 세력으로서, 이 때 대두해 세력을 굳힌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왕(太祖王) 또는 ‘국조왕(國祖王)’이라는 왕호를 칭한 것도 신흥세력으로서의 의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후 태조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그들의 계보의식 또한 태조왕을 시조로 여겼다. 이런 태조왕계와 주몽왕계를 합쳐 주몽을 시조로 하는 일원적인 왕계를 구축한 것은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 이후였고, 그것이 〈광개토왕릉비〉에 기술된 고구려왕계이다. 그 과정에서 모본왕과 태조왕을 계보상으로 직결시키려고 한 결과 태조왕의 수명과 재위 기간이 과도하게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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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1
  • 저작시기2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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