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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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백제의 멸망
(1) 의자왕과 대외관계
(2) 황산벌전투와 사비성의 함락
2. 백제의 부흥운동
(1) 백제의 부흥운동
① 부흥군의 봉기
② 부흥운동의 전개
③ 부흥군의 내분과 좌절
④ 백강구전의 대패와 부흥운동의 실패
⑤ 부흥운동의 실패 그 이후
(2) 왜의 원군 파견에 대한 고찰
① 원군 파견의 준비과정
② 원군 파견의 목적 연구
③ 파견된 원군의 구성

Ⅲ. 결론

본문내용

서기』를 살펴보면 일본 학자들의 위와 같은 논리와 반대되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백강구전의 파병동기를 ‘복신의 뜻에 따라’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지원 요청에 의한 파병이었음을 확실히 해주는 것이다. 즉 왜의 파병은 왜 조정이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파견한 군대가 아니라 백제부흥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에는 ‘당시 일본군은 부여 풍의 무리이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는 당나라가 백강구에 온 왜군을 부여 풍이 이끄는 무리 즉, 백제의 군대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백제에 파병된 원군을 구성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이었는지 알아보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는 우선 뒤로 미뤄두고 우선 원군 파견의 목적을 계속 알아보자.
백제부흥군을 위한 원군 파병을 진두지휘하던 제명여왕은 파병준비 1년여 만에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뒤를 이어 제명여왕의 아들인 중대형 왕자가 왕위에 올라 파병준비를 계속하였다. 이 중대형 왕자가 바로 천지왕인데, 천지왕이 즉위식도 미루고 파병준비를 계속 했던 것과 관련하여 그의 아버지인 서명왕에 관하여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서명왕은 자신의 왕궁을 백제궁이라 하고, 백제대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인 판축기법으로 지어졌으며, 백제식 문양이 새겨진 기와를 사용하여 세워졌다. 또한 서명왕이 죽은 후 그의 빈전은 백제대빈이라 불렸다.
고대 일본의 황족과 귀족들 중, 주요 성씨의 계보를 적어놓은 『신찬성씨록』에는 ‘민달손 백제왕’이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민달은 서명왕의 할아버지인데, 민달왕의 손자가 백제왕이라면 자연히 민달왕 또한 백제계라고 할 수 있다. 천지왕의 선대 할아버지인 민달왕은 정말로 백제계였을까?
민달왕의 할아버지인 계체왕을 모신 스다하치만 신사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청동거울이 보관되어 있다. 이 거울에는 ‘503년 남제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사마께서 아우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 거울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즉 이 거울의 주인은 남제왕이며, 거울을 만들어 선물한 이는 남제왕의 형인 사마라는 것이다. 그런데 남제는 일본어로 오호도이며 오호도는 계체왕의 또 다른 일본식 이름이다. 즉 남제왕은 계체왕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사마 즉 백제의 무령왕의 아우가 일본의 계체왕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령왕의 아우인 계체왕의 손자가 민달왕이며, 민달왕의 손자가 서명왕이고, 서명왕의 아들인 천지왕이므로, 천지왕은 백제계 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파병을 실행에 옮긴 천지왕은 백제계 왕통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위기에 처한 백제를 위해 파병에 나선 것은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라기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③ 파견된 원군의 구성
당시 제명여왕이 후쿠오카로 가기 위해 머물렀던 오카야마에는 길비진 신사가 가장 대표적인 신사이다. 이 신사에는 고대 이 지역의 최고통치자였던 ‘우라’라는 인물을 기리는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다. 또한 이곳에는 우라의 성으로 알려진 키노조 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키노조 성의 축성방식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으로, 백제의 수도, 부여 나성의 축성 방법과 동일하다. 즉 백제식의 성을 쌓고 살았던 우라는 바로 백제인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지역의 사람들도 백제의 왕자로 알고 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최고 수준의 제철기술을 가졌던 백제인들이 집단으로 건너와 이곳에 정착하면서 오카야마 일대는 크게 번성하였다.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오카야마의 백제인들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 그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역에 있는 굴식돌방무덤이다. 이 굴식돌방무덤의 주인은 백제인이었으며, 이 고분은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것으로, 일본 땅의 백제인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소식을 전해 들었을 이곳의 백제도래인들은 백제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곳 사람들의 다수가 파병된 원군의 구성인원으로 참가하였을 것이다.
또한 비후국(지금의 구마모토)와 이예국(지금의 에히메)에서도 파병과 출자가 이루어졌다. 이곳에는 삼곡사 터가 남아있는데, 이는 백강구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백제인들이 세운 것으로, 당시 이 지역의 백제도래인들 또한 백제부흥권의 원군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파병된 원군의 대다수는 백제도래인으로, 그들은 고국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한 귀소성적 참전을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Ⅲ. 결론
지금까지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그리고 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왜에서 파견된 원군에 대해서까지 알아보았다.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진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인들의 무서운 저력을 보여준 사건으로, 678년 동안 타오르다 한 줌의 재로 사그라진 백제 왕조에 대한 진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백제라는 왕조는 역사의 뒤편으로 묻히고 말았으나, 그들이 창조한 문화의 가지는 신라와 일본 등지로 뻗어 나가 이후로도 오랜 세월동안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비록 그 부흥은 실패하였지만,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명성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모두가 인정하는 지금,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문화적 멸망은 그 어느 세력에 의해서도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또한 국가의 위기 속에서 백제인들이 하나가 되었던 부흥운동은, 성패의 문제를 떠나서 백제인이라는 정신을 한데 모아 정신적 부흥을 이룩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 고 자 료>
박영규, ‘제 31대 의자왕실록’,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2000
유원재 편저, ‘제 9장-백제의 부흥운동 (심정보 저)’,『百濟의 歷史와 文化』, 學硏文化 社, 1996
변린석, 『白江口戰爭과 百濟 倭 관계』, 한울, 1994
이기동, ‘제 2장-백제왕국의 흥망’,『百濟史硏究』, 三信文化社, 1996
KBS 1 TV, <>, 제 23편-일본(倭)는 왜 백제부흥에 사활을 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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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04
  • 저작시기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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