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가와 경덕왕의 왕권강화책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안민가와 경덕왕의 왕권강화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배경설화
2. 안민가의 해석
3. 오악 삼산의 신
4. 경덕왕의 왕권
5. 경덕왕의 종교와 정치
6. 충담사의 정체

결론

본문내용

과 친한, 또는 귀족의 자제중 하나일 것이다. 게다가 왕의 앞에서 ‘이리저리 거닌다’는 자체가 왕의 심기를 거슬렸다. 즉, 그는 귀족출신 승려로 왕을 곱게 보지 않는, 일종의 반왕당파 세력의 일부라는 것이다. 왕은 그러한 승려에게 안민가를 맡기고 싶지 않아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 온 이가 충담사였다. 그는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데, 왜 하필 남쪽일까.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일전, 월명사의 경우에도 남쪽에서 걷고 있는 것을 왕이 불러들였다고 하였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 왕이 불러들일만한 방향이 남쪽이라는 것은 분명 ‘남’이라는데 무시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예(禮)에 보면 이러한 말이 나온다.
'병자는 북쪽 창 아래에 있는데 임금이 문병하려 오면 남쪽 창 아래로 옮겨 임금으로 하여금 남쪽을 향하여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
병자라 하더라도 임금이 왔을 때에는 임금이 남쪽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좌청룡 우백호가 동청룡 서백호로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방위는 임금의 시선에 의거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좌-서쪽 우-동쪽 과 방위가 다른 이유는 임금은 남쪽을 보고 방위를 정하고 우리는 북쪽을 보고 방위를 정하기 때문이다. 즉, ‘임금’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북쪽에 앉아 남쪽을 굽어보아야만 한다.
앞의 승려는 왕의 앞을 이리저리 거닐며 임금의 방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오만한 귀족의 모습을 뜻한다. 반면 충담사는 남쪽에서 북을 보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왕이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왕이 굳이 그 충담사를 선택한 것은, 충담사 그 자신의 능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귀족들이 아닌 민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근대적인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고자 했던 경덕왕이 민중의 소리를 듣기 위해 남쪽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충담사는, 그 민중의 입을 대변하는 대변자 노릇을 해 준 것이다.
여기에서 충담사의 신분을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앞에서 계속 승려라 하였는데 충담사의 신분이 과연 승려인 것일까. 승려라고만 생각하기엔 충담사는 지나치게 유교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사’라는 호칭에 대해 이론이 분분하다. 조지훈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함에 있어 승려일 때, 이름 앞에 '석(釋)'자를 붙였고, 국선일 경우에는 이름 뒤에 '사(師)'자를 붙였다고 주장했으며 박노는 순수 승려일 때, 이름 앞에 '석'이나 '승자'를 붙였고 화랑과 관계된 이중적인 면을 지닌 승려는 이름 뒤에 '사'자를 붙였다고 하였다. 둘 역시 의견은 다르지만 충담사의 ‘사’자를 단순한 승려가 아닌 국선의 무리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 국선은 화랑을 통솔하는 화랑 속의 승려와도 같다. 경문왕과 마찬가지로 경덕왕 역시 화랑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 이들의 노래가 모두 주술적인 의미로 쓰였다는 것으로 이들을 무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이유의 근거는 단군신화에서부터 나오는데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오며 데려온 이들, ‘풍백, 운사, 우사’중 운사와 우사에게 ‘사’자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람과 비, 구름을 관장하는 무당이라 추측할 때 ‘사’자는 옛날에 국가의 무당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는 말이다.
결론
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이래 불과 5대가 지나 무열왕의 왕통은 단절되어 버린다. 그 와중에 김유신이 신라 왕권과 손잡기를 바래 마지않았던 그의 사위가 신라 왕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고, 그로 인해 신라 내의 가야 세력이 크게 위축되기도 하였다. 초기의 왕권은 강하였다. 과감하게 귀족의 세력기반인 녹읍제를 철폐하고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집권 체제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부족, 귀족 중심인 신라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왕의 세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다시 귀족이 커가며 왕은 왕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는 하극상이 심해져갔다.
경덕왕은 3대의 왕비가 교체되는 모습을 보며 살아왔다. 그것은 왕비의 의지도 왕의 바램도 아닌 귀족들의 세력다툼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통일로 인해 정점에 도달했던 신라 왕가가 점자 내리막길로 달려가는 걸 보며, 그는 신라 왕가의 부흥을 꿈꿨다. 처음부터 강력하게 귀족을 탄압하고 왕권을 세우려 하였지만 한번은 후계자의 부재가, 또 후에는 나약한 후계자와 늙은 자신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분명 훌륭했다. 다른 길로 빠졌어도 신하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귀족들을 탄압하고 민중을 구제하는 구제책을 쓰는 임금이었다. 그 덕분에 내리막길로 달려가는 신라의 왕조를 잠시 멈출 수는 있었지만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모든 세력 기반을 빼앗기고 어린 아들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소극적인 안민가를 지어 제를 올리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만다. 안민가의 내용은 단순하다. 임금은 아버지고 신하는 어머니고 백성은 아이이니 모두가 자신답게 스스로의 주제를 알고 일을 한다면 평안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경덕왕이 바란 이상세계였을 것이다. 신하가 신하답게 임금에게 복종하고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와 백성을 다스리는. 하지만 이것은 한낱 경덕왕의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 바로 다음에 실린 표훈대덕조에서 나라가 위태로워 질 것이라는 말에도 무조건 아들을 낳겠다고 우기는 경덕왕의 모습은 왕이라기보다 아집에 찬 모습이었고 이후 혜공왕의 모습은 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국가 전복을 하여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관을 쓰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전개되는 신라 하대 사회를 보면 분명 이 안민가는 경덕왕과 충담사가 남기는 마지막 경고이자 간절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일 연 [삼국유사] 솔출판사
김부식 [삼국사기] 신원문화사
김대문 [화랑세기] 도서출판 장락
참고논문
조재현 [안민가에 대해서] 중앙대학교 향가기행<1999, 통권 2호>
양상진 [신라 중대의 국학과 경덕왕의 개혁정치] 경희대 대학원 2004
신정훈 [신라 경덕왕대 왕권강화책의 추이와 그 성격] 연세대 대학원 1999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6.09.18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444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