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제국의 정치체제 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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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체제 의 변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분명하게 형태를 갖추고, 통제경제와 인플레이션(Inflation) 이 진전되어 제국의 구조가 변하여가는 시대였다. 세베루스 왕조 최후의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더가 살해당한 뒤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로 바뀐다.
로마제국은 3세기에 대외적 ·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됨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 고대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다. 이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와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I) 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 일이었다. 이미 네로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기도 하였고,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여졌다.
또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는 민중의 선동에 의하여 자주 일어났으며, 본래는 외래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 왔던 로마제국 정부도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50년 데키우스 (Decius) 황제의 포고, 즉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 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내란을 수습한 로마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디오클레티아누스 (재위 284∼305)는 변경 수비를 또다시 굳게 하고 통치기구를 정비, 로마를 중앙 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다. 286년 부제(副帝)인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를 정제(正帝)로 승진시켜 그에게 서방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동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293년에는 다시 부제를 각각 새로 임명하여, 사분통치제(四分統治制)를 확립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군대의 재건, 재정의 재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현물징발을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로 하는 세제(稅制)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부과금(賦課金)은 공평하게 토지 단위(Iugum)와 인두(人頭) 단위(Caput)로 할당되었다. 또 행정상의 개혁으로는 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管區)라고 이름 붙인 12개의 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전제군주정체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황제 퇴위 후 내란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였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하였다. 황제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교의논쟁(敎義論爭)의 해결을 꾀하였다. 이어서 330년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를 개설하여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더욱 더 굳건히 하였다. 황제는 라인, 다뉴브의 국경선에서 게르만인을 격퇴하는 한편, 게르만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다. 전제군주 정치 하에서 로마 시민의 직업 세습이 크게 진전되고, 또한 세제의 강화와 함께 징세의 임무를 맡는 도시참사회원 신분의 세습화도 촉진되었다. 더구나 농촌에서는 소작인의 이동이 금지되어 경작인(Colonus)은 신분상 많은 구속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국에서 자유로운 시민생활은 사라지고 군사 국가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一族)의 내분으로 제국은 황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끌어 가던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율리아누스 (Julianus)는 전통적 제의와 이교를 부흥시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로마 전통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 치세는 단명으로 끝났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로마에는 동방에서나 라인, 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 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us Ⅰ)의 활약도 소용없어서 서부에서는 알라만인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난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 판노니아, 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 (Goths)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Huns)에게 쫓긴 서(西)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발칸반도 동부를 짓밟고 마침내 로마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 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停滯)는 극도에 달하였다. 고트족은 한때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에게 쫓겨났으나 결국 382년의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동안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리논쟁과 종교정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고 말았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武將)인 스틸리코 (Stilicho)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치는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Vandals)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 (Odoacer)가 로마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476). 한편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경제적, 문화적으로 활력이 있었고, 통치기구도 정비되어 있었으므로 서쪽의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여 동로마제국(Byzantium Empire), 즉 로마제국의 정통으로서 1453년 오스만 투르크(Osman Turk)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800년 샤를마뉴 (Charlemagne)의 즉위는 로마제국의 부흥을 의미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로 알 수 있듯이 황제들은 로마적,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보호자로서 그 권위를 지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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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13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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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8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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