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주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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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프랑스 제국주의의 배경

Ⅲ. 프랑스 제국주의의 과정

Ⅳ. 식민지 정책
(1) 식민지의 법령
(2) 식민 지배와 착취

Ⅴ. 거대한 제국
1) 아프리카
ㆍ북 아프리카
ㆍ검은 아프리카
ㆍ마다가스카르
2) 누벨칼레도니
3) 인도차이나
ㆍ캄보디아

Ⅵ. 파리에 세워진 식민지 건축물 - 만국 식민지 박람회

Ⅶ. 결론

본문내용

에서 식민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이나 정책은 식민 행정관의 의지와 능력은 물론 식민화가 된 시기, 기존 현지의 정치체제, 그리고 현지인들의 대응에 따라 달라졌다. 통킹(Tonkin)은 법적 지위로는 베트남 중부 즉 안남(Annam)과 마찬가지로 보호국이었으나, 1897년 후술할 경략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실제로 코친차이나의 식민지와 비슷한 상태에 놓였다. 안남에서 응우옌 조정은 안남민에 대한 지배권을 일정 정도 인정받아 전통적인 의미의 보호국체제가 실현되었다고 평가된다.
ㆍ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에 건축된 앙코르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
1866~1868년에 인도차이나를 탐험하던 프랑수아 가르니에와 해군 중령 에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는 고대 크메르 왕국의 화려했던 수도인 앙코르와트를 발견했다.
노로돔 1세는 1863년 프랑스의 보호령을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앙코르를 지배하고 있던 샴족과 가까워지면서 생각을 바꿨다. 두다르 드 라그레는 궁전을 포위하는 등의 조취를 취했다. 그러자 캄보디아는 별다른 저항 없이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보호령은 쉽게 유지되지 않았다. 본국은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싶어 했고 그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단순한 보호령일 뿐이었던 캄보디아는 이웃한 코친차이나 식민지처럼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자원이 너무 빈약한 데 크게 실망해 캄보디아의 발전을 위해서 전혀 투자하지 않았고, 교육기관도 세우지 않아 캄보디아는 국민 95%가 가난한 농민으로 남은 뒤떨어진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프랑스 극동 학회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 대대적인 유적 발굴, 분류, 보존 작업을 시행하며 1940년까지 1940년대 들어 캄보디아도 뒤늦게 지식인 계급이 형성되고 민족주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캄보디아를 지배했다.
Ⅵ. 파리에 세워진 식민지 건축물- 만국 식민지 박람회
1931년에 열린 국제 식민지 박람회를 통해 서구는 피비린내 나는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질병과 문맹을 퇴치하고자 하는 문명 전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당시는 식민지 지배가 위기를 맞은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자국민들이 프랑스 제국을 다시 한 번 신뢰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박람회에서는 화려한 구경거리와 이국적인 건축물을 보여 주고자 했다. 식민지 지배국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한 의식들을 선보였다.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이 아무리 제국주의적 사고의 위험성과 식민지에 대한 폭력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해도, ‘환상적으로’ 왜곡된 아프리카와 동방의 신비롭고, 장대하며, 화려하게 재현된 건축물들에 관객들은 매료되었으며, 제국 팽창의 정담함과 필요성을 아무런 비판 없이 ‘즐기며’ 받아들였다. 기독교 선교관이나 군사적 상징탑을 보며 관람객들은 프랑스의 문명과 사명과 세계 속에서의 우월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기재들은 통해 프랑스인들은 식민지 사업의 이면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폭렬성과 잔인성을 무시한 채, 프랑스로 인해 미개한 나라들이 개화되고 ‘진보’한다는 ‘문명화 사명’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박람회를 통해 드러나는 또 다른 인식은 바로 프랑스인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문명화된 유럽과 미개한 아프리카와 동방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와 동방에 대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그들이 세운 건축물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그 지역에 대한 정확한문화적 이해 없이 왜곡되고, 상상되고, 정형화된 이미지가 건축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짚으로 된 거친 구조의 집은 식민지의 미개함을 상징하고,’인도‘라는 환상의 이미지가 동방과 그 이외 지역 전체에 적용되어 터무니없는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1931년 박람회는 당대의 식민지의 일상을 보여주기보다 프랑스인들이 만들어낸 상상속의 창작물에 가까웠던 것이다.
Ⅶ. 결론
프랑스 식민지 건설은 1830년 알제리 점령과 함께 재개되었으나, 그것이 발달하고 절정에 이른 것은 1870년 제 3공화국의 탄생과 함께였다. 제 3공화국 초기부터, 프랑스는 ‘새로운 사회’를 창출한다는 유토피아적인 전망 가운데서 특별히 식민지 활동을 통해 ‘진보’로의 여정을 계속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식민지 활동은 ‘문명화’, ‘과학’, ‘진보’, 그리고 ‘국가의 위대함’ 등과 같은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의 이념을 국내외적으로 실현시켜 나갈 것을 천명한 프랑스는 그들이 ‘해방’시켰다고 믿는 민족에게 착취가 아니라 개발을 전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가 프랑스에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진다. 식민지 지배 형태와 본국과의 관계에 따라 식민지 청산 방식도 달랐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외교적으로 해결됐지만, 알제리와 인도차이나는 피를 흘려야 했다. 이렇듯 아직도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지배를 결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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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13
  • 저작시기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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