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혁명가(전봉준, 세종대왕,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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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세종대왕 - 전봉준 - 김옥균 순으로
1. 인물소개
2. 사회적 배경
3. 개혁내용
4. 실패이유
5. MBTI, TA분석
6. 결론
7. 비슷한 인물

본문내용

나 온정이 있지만 AC(순응하는 어린이)가 높으므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삭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분전환도 잘 할 줄 모르므로 싫은 감정을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고 자율신경 실조증 등의 스트레스 병이 되기 쉬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분석 결과에 대해서 평가하면 김옥균은 NP부분이 높게 나와있다. 이는 CP의 비난적인 면보다 쉽게 공감하고, 양육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김옥균은 지나친 개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웃 일본의 발전에 매료되어서 일본이 모든 문물이나 지식, 정책, 사회면까지도 닮아가기를 원했다. 타국에 대한 전반적인 면을 큰 비판없이 공감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자신의 태도도 일본이 자신을 잘 도와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는 막연한 믿음을 가졌다. A(어른 자아상태)는 중간을 나타내는 데 이것은 현실에 대한 안목으로서 그는 절반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세계정세변화에서 선진적인 문물에 대한 남다른 이목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선진국을 이루기 위한 개화를 생각하였다. 이러한 좋은 안목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에서는 인접한 청과 일본의 정세를 바르게 보지 못하였고, 국내의 정세에 대한 암목도 부족하였다. AC부분이 높은 것을 보면 신중한 모습이 적은 것은 이와 맞지 않았으나, 주체성 결여라는 부분에서 그의 개혁은 조선 자체의 개혁인지 일본에 의한 개혁인지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갑신정변을 일으키면서 일본군을 조선의 궁에 끌어들여서 이를 실현하려고 한 점은 정변이후 3일 천하로 끝나지 않았다면 일본에 의한 조선의 침략을 더 가속화 시켰을 지도 모른다. 스스로 개혁을 꿈꾸기보다는 주변 강대국에 너무나 크게 의존한 김옥균이 모습은 진정한 자주개혁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주체성을 잃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교류분석은 나라의 발전을 위한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 헌신패턴이었지만 주체를 잃고 자아가 분명치 않은 부분의 단점을 보이고 있다.
(7) 전봉준과의 비교
1) 공통점
전봉준과 김옥균은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조선 말기에 문란해져 가는 조선 사회를 바꾸기 위한 개혁가였다. 특히 둘의 사상은 봉건주의 타파에서 같은 맥락을 잇고 있었다. 조선의 계급사회로 인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봉건주의를 타파하기를 원했고, 그것은 곧 계급사회를 떠난 평등주의를 꿈꾸었다. 물론 이러한 봉건주의의 타파에서 나온 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전봉준은 상위계급의 존재가 하위계급의 억압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없애고 싶다는 것이 주였고, 김옥균은 인재들은 계급과 신분여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능과 실력이어서 이러한 봉건주의 타파로 인재의 사회기여도가 더욱 늘어나는 것을 기대했다.
2) 차이점
둘은 개혁가로 같은 시대에 같은 주장을 했지만 김옥균은 전봉준과는 달리 상위 계층이 부르조아 지식인 중심의 개혁이었고, 반외세가 아닌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서 이를 조선에 옮기려고 한 점에서는 달랐다.
(8) 인물평가
김옥균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많은 안타까움이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의 성공이 지속되었고 그로 인한 조선이 변화하였다면 조선은 지금의 역사보다 10년은 더 빨리 발전하였을 것이다. 물론 일본에 대한 지위도 상승하여서 일본에 의한 침탈도 빨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김옥균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정신, 그리고 그 이상향에 대한 계획은 완벽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족했던 것 같다. 성급한 개혁가라고 불려야 하는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김옥균은 어찌보면 돌연변이와 같이 양반계층에서 보수를 버리고 개혁을 꿈꾼 인물이었기에 그 개혁 과정도 양반이라는 틀을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 민중에 대한 지지 여부였다. 상위계층에서 계급사회를 없애는 반봉건주의의 기치까지 내세웠지만 그것은 부패한 조선사회에 대한 해결책이었지 민중에 대한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혁의 하나의 큰 무기가 될 수 있었던 민중을 소홀히 한 것은 양반으로서 평소에 바라봤던 민중에 대한 소홀함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역시 국가를 생각한 애국자라는 점에서는 높게 평가된다. 그는 자신이 국가의 중심이 되기를 원치 않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중심이 된 것이었다. 그러한 점은 갑신정변의 성공 후 정책의 발표에서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조선으로 돌아오게 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선진 문물로 주변국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조선을 그는 바라고 있었다.
(9) 유사한 인물(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1835 ∼ 1867)는 원래 일본 에도시대의 무사로, 대정봉환(정치적 권력을 막부로부터 덴노의 조정에게 되돌려줌)을 주도해 실질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다.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츠마번과 쵸슈번의 동맹 및 막부와 번의 통일을 성사시킴으로써,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즉, 김옥균이 일본에서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그 역시 상위 계층인 무사 계층에 있었고, 그 계층에서 변화를 꿈꾸었으며 신분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기존의 막부체제에 대항하여서 근대국가의 토대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일본의 최초 벤처기업을 세우기도 하였고, 해운회사를 건립하여 훗날 해군의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그는 막부의 국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준 대정봉환에 기여를 하였고, 이 사건은 일본을 근대국가로 이끌게 하였다. 료마는 서양의 정책을 주시하였고, 경제와 정치 부분에 이를 수용하기를 종용하였다. 33살이 나이로 암살당하지만 김옥균과는 달리 그의 정신은 일본에 뿌리박혀 메이지 유신 이후 계속적인 개혁을 성공해 나갔다. 신문기사나 잡지에서도 이를 최근에까지 언급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료마의 정신을 숭상하여 일본의 소프트 뱅크 같은 대기업을 비롯한 벤처기업의 사업가들도 그의 모습을 닮으려고 한다고 전해진다."
-월스트리트 저널(2000.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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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16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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