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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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석탑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는 우수한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조각 등이 고려 시대의 작품인 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호)과 흡사할 뿐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또 하나의 이형 석탑으로는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평면이 8각인 원당형(圓堂形)을 이룬 탑으로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희귀한 예의 8각형석탑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에는 전대인 고려 시대와 같이 다양한 형식의 탑이 조성되지 못하였으며 고려 시대 석탑의 조형과 양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억불 정책 아래에서도 전대의 불교적인 양식을 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여줄 뿐 아니라 불교 미술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전통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탑(木塔)
목조의 중층누각(重層樓閣) 형식의 탑.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塔, stupa)은 인도의 복발형(覆鉢形)에서 시작되어 중국에 들어오면서 고루식(高樓式) 목탑으로 변형, 발달되었는데, 일찍이 이러한 형식의 목탑이 우리 나라에도 전래되어 발전되었다.
우리 나라에 언제부터 목탑이 건립되었는지는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372년 고구려에 불교가 수용된 뒤 얼마 안 있어 사찰이 세워질 때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 평양의 구사(九寺) 등이 함께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 가람(伽藍)이나 탑에 대하여 구체적인 것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다만 평양성의 고구려 영탑사(靈塔寺)의 전설이 건탑(建塔) 기록으로 전해 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재 만주 요양(遼陽)지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이 있었으며, 그 옆에 탑이 있어 삼중토탑(三重土塔)이었던 것을 성왕이 신심발원(信心發願)으로 칠층목탑을 건립하였는데, 그 뒤 높이를 줄이려다 목탑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비록 황당무계한 것이지만 "칠층목탑을 건립하였다(起木塔七重)."라는 기록은 고구려의 목탑을 처음으로 기술한 것으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또, 1938년 발굴조사된 평양 부근의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는 중앙에 8각형의 건물지를 중심으로 동·서·북에 전지(殿址)가 있고 남쪽에 중문지(中門址)가 있어 삼금당일탑식(三金堂一塔式)의 가람배치를 보여 주고 있는데, 그중 8각전지가 목탑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 8각전지는 고려 영탑사의 창건설화 중 “팔면칠급석(八面七級石)”이라는 기록과 비교해볼 때 당시 8각탑이 조영되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지금까지 알려진 백제 시대의 목탑 유적은 1935년 발굴조사된 부여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금강사지(金剛寺址), 1980년부터 발굴되어 현재까지도 조사가 진행중인 미륵사지(彌勒寺址) 중원탑지(中院塔址) 등에서 볼 수 있다. 군수리사지는 부여의 남쪽 백마강에 면한 구릉지에 있고, 보고서에 따르면 중문지·탑지·금당지(金堂址)·강당지(講堂址)가 일축선상에 놓인 1탑식 가람배치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탑지 기단 안쪽의 외곽선 가까이에는 7개의 탄화된 방형(方形)의 기둥자리가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기단 중심에서 큰 심초석(心礎石)이 발견되어 이 건물지가 목탑지로 추정되고 있다.
또, 금강사지는 발굴 결과 처음부터 동향(東向)의 1탑식 가람으로 밝혀졌는데, 목탑지의 중앙부에 심주(心柱)를 세웠던 깊은 지하 암반층에서 심초구멍이 발견되었다. 다음으로 미륵사지의 목탑지는 동·서 석탑지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기단 내의 정교한 판축(版築)과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목탑지임이 밝혀졌다.
신라 시대의 목탑은 황룡사지(皇龍寺址)의 목탑지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 때 2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탑을 세웠는데 탑의 높이가 노반(露盤) 이하 183척이며 상륜부가 42척으로 총 225척의 구층탑이었다고 한다. 197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처음부터 기단 상면과 초석이 노출된 상태에서 조사되었다. 초석의 배열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7칸씩이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화강암제의 심초석이 놓여 있고 그 밑에 넓은 판석이 받치고 있다.
심초석 밑에 있는 넓은 판석 중앙에는 사리를 봉안하였던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이 패어 있었고, 그 위에 석재의 덮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심초석 아래의 거대한 판석 밑에서는 금동태환이식(金銅太環耳飾)·동경(銅鏡)·백자호(白磁壺)·수정옥(水晶玉) 등 200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리를 봉안하고 심주를 세우기 전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된 장엄구였음이 밝혀졌다.
신라의 목탑은 이러한 1탑식 가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2탑식 가람에서도 사용되었음이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등에서 보인다. 이 두 목탑지는 정, 측면이 모두 3칸씩이며 그 중심에는 심주를 받치는 심초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목탑은 삼국 시대 뿐 아니라 고려 시대도 세워졌음이 만복사지(萬福寺址)의 탑지로 밝혀졌고, 조선 시대까지도 전해져왔음을 현존하는 유구에서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목탑의 대표적인 예로는 1624년에 세워진 법주사 팔상전(法住寺捌相殿)을 들 수 있다. 화강암제의 장대석으로 된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5층목조 양식의 건물로서 건물 중앙에 심주가 있어 5층 기둥 밑까지 뻗어 있다. 이 목탑은 건평이 약 39평이며 그 높이가 상륜부까지 약 20m 가까이 되는, 우리 나라의 현존하는 목탑 건물 중 가장 큰 탑이다.
이 밖에도 조선 시대의 목탑으로는 쌍봉사 대웅전(雙峰寺大雄殿)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1984년 4월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현재 복원되어 있다. 1962년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라 1690년 두번째 중건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가구식기단(架構式基壇) 위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방형 평면의 3층 다포계양식(多包系樣式) 건물이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韓國木造建築(金正基, 一志社, 1980), 古蹟調査報告(朝鮮古蹟調査硏究會, 1938), 三國時代의 佛敎建築(鄭永鎬, 考古美術 150, 1981), 皇龍寺址를 中心으로 考察해본 우리나라의 古代寺刹伽藍(張慶浩, 大韓建築學會誌 24-96·97,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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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12
  • 저작시기2007.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7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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