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연구]조선전기 신진사대부의 등장배경과 활동 및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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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1. 신진사대부의 성장
2. 권문세족과 사대부
3.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4. 권문세족(權門勢族)

Ⅱ. 여말 신진사대부의 등장 배경
1. 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2. 신진사대부의 성장
3. 신진사대부의 활동
4. 신진사대부의 성격
5. 권문세족의 성격

Ⅲ. 여말의 주자 성리학의 수용
1. 주자 성리학 수용의 역사적 배경
2. 여말 사상계의 동향
3. 주자 성리학적 정치의식
1) 배불론과 그 정치적 의미
2) 성리학적 실천규범의 보급

Ⅳ. 조선왕조건국과 사대부의 역할

Ⅴ. 맺음말

본문내용

주·이첨·설장수도 공양왕 옹립에는 참여했으나 조선 건국과정에서 이성계파와 대립하고 있었다.
)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신진사대부의 정치노선과 사상경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鄭求福, <雙梅堂 李詹의 역사서술>《東亞硏究》 17, 서강대, 1989
金貞子, 〈騎牛子 李行(1351~1432)의 생애와 학풍〉《釜大史學》 19, 1995
성석린 역시 이성계와 함께 9공신에 포함되는 등 공양왕 옹립을 주도했으나 왕조교체에 반대함으로써 이색·우현보의 당여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 《高麗史》 권 117, 列傳 30, 成石璘
결국 사전개혁과 공양왕 옹립, 그리고 왕조교체를 추진하는 등 일관된 정치노선을 유지했던 대표적인 신진사대부로는 조선개국공신이기도 했던 정도전·윤소종·남은·남재·오사충·조인옥 등으로 좁혀졌다. 이들은 위화도회군 후 역시 분화의 길을 거도 있던 세족출신 사대부 가운데 조준·金士衡·鄭摠 등 정치노선을 같이하는 인물들과 연대하여 조선건국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조선건국에의 참여 여부는 물론 사상경향이나 정치적 지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진사대부 내에서의 차별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른바 '杜門洞 72賢'에 속하는 인물들의 면면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 金貞子,〈소위 '杜門洞72賢'의 정치성향〉(《釜大史學》15·16, 1992)
상당수 신진사대부는 주자성리학적 사상경향과 현실 개혁적 성향의 소유자들이면서도 조선건국의 주도세력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이들을 신진사대부층에서 제외할 수는 없을 것이다.
Ⅴ. 맺음말
고려가 개국이래 중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內憂外患의 민족적 수난이 거듭되고, 이와 더불어 정치적·경제적 주도세력이 계속적으로 교체를 진행한데 그 중에서 특히 무신란이라는 일대사건을 겪으면서 문신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등장한 것이 종래의 문벌중심귀족과 성격을 달리하는 '能文能吏'의 새로운 지방토착세력출신의 新進仕人들이었다. 이들은 그 후에 또 다른 외세의 침입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게 되고, 이때에 외세를 등에 업고, 등장한 권문세족과 일부는 결탁하나 대다수는 극한 대립을 보이면서 착실히 성장해 나갔는데 이들이 여말의 본격적인 新進士大夫의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元의 지배하에서 등장한 附元輩 권문세족에 의해 사회와 문화가 모순 속에 쌓이게 되고 民生이 극도로 쇠퇴해갔다. 이처럼 국가의 존망이 거듭 문제시되고 국가권력의 存立基盤인 민 민생을 외면하고 있던 고려후기의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고자 노력한 계층이 또한 신진사대부이다. 이들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혼란된 국가질서를 바로잡고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힘써 온 왕과 의견을 같이 하며 유교적 신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학자적 관료로서의 성격 때문이었다.
원의 지나친 간섭과 권문세족들의 腐敗에 대항하여 國權과 民生의 守護를 위해 애써온 청렴하고 결백한 이들은 왕과 더불어 수차례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권문세족의 위력에 눌려 실패하고 말았으나 실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은 계속 살아 남아 결국은 사대부의 승리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들이 정치의 기본으로 삼은 性理學은 원래 形而上學的인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으나 그것보다는 실천적 유교로서의 입장에서 수용하여 정치개혁의 手段으로 삼음과 동시에 權門勢族과 깊은 연결을 맺고 갖가지 폐단을 유발시켜 온 불교계에 대해 비난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배척에서 사대부들은 두가지 위상을 보이게 되는데 소위 소극적 배불론과 적극적 拜佛論이다. 消極的 拜佛論자들은 대체로 고려왕조에 대해 충절을 지키는데 佛弊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불교교리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여말사대부의 대다수가 이에 속한다. 반면 적극적 배불론자들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개국공신들로서 이들의 배불론이 적극성을 띤 것은 불교교리 자체의 모순에 대한 지적보다도 왕조교체의 정당화를 위한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국가와 역사의 존망이 계속적으로 문제되었던 여말의 狀況에서, 신진사대부들은 자기성장을 위해서도 사회의 안정과 지배질서의 제도적장에 힘쓰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사대부들의 개혁의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대부들 국권의 회복, 왕권의 안정, 정방의 혁파, 민생문제의 해결과 같은 일련의 개혁에 힘쓰게 되었는데, 이는 외세의 부당한 간섭과 권문세족의 恣意적인 지배에 대한 투쟁이었던 것으로, 당시의 민족적인 현실의 요청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의 개혁론은 객관적인 條件이 성숙되지 못하였고,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의 결여로 번번히 좌절되었다. 그러나 신흥무장 이성계와 결탁한 개혁파 사대부들에게 실질적인 정권이 장악되면서, 소위 「罷政房復科田」은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여말사대부 성리학자들은 양대세력으로 나누어져 투쟁하는데, 이는 방법에서의 견해차일뿐 현실인식과 개혁론은 동일한 것이었다. 시대적 중요성과 더불어 여말사대부에 대한 연구가 더욱 詳細하게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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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錫範 「麗末 士大夫에 關한 硏究」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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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19
  • 저작시기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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