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연보와 사상 및 작품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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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생애와 사상
1) 성장과정
2) 연암 박지원의 사상
3) 북학사상의 형성과 현실 개혁론

2. 박지원이 남긴 문학작품
1) 저서
2) 연암소설의 일반적 특징

3. 양반전
1) 이해와 감상
2) 양반전의 시대적 배경
3) 양반전의 풍자 대상
4) 양반전을 쓴 동기

4. 박지원의 문학에 반영된 실학사상에 대한 이해

5. 박지원의 '열하일기'

6. 박지원의 문학관

본문내용

류하고 8월20일 북경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이들은 9월17일 북경을 출발, 10월27일 서울에 도착해 복명(復命)한다.
열하의 본이름은 무열하(武熱河)인데 현재 북경에서 230킬로 지점에 있는 하북성(河北省)의 승덕(承德)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건륭 황제가 피서산장이라 이름 붙인 별궁을 완성한 뒤 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그곳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북경 다음으로 정치적 중심지가 됐다. 그리하여 한 때는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몽고, 티베트, 위구르,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서 온 외교사절들로 성시를 이룬 곳이다.
이렇듯 연암이 여행했을 당시 청나라는 세계 최대의 문화국가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중국의 선진 문물은 큰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를 접하고 돌아온 연암은 곧바로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한다.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홍대용은 소와 농기구, 돈과 종이 등속을 보내 저술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격려 덕분인지 연암은 ‘열하일기’ 한 편으로 당대에 명성이 절정에 오른다.
고려말부터 조선왕조까지 500여 년간 중국 사행사 그룹에 끼어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수천여 명이나 되고, 사적인 여행기만도 500여 가지는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연행록 중에 왜 유독 ‘열하일기’인가. 우선 책의 이름부터 다르다. 대부분 중국 여행기는, 명나라는 ‘조천록’이나 ‘조천일기’, 청나라는 ‘연행록’이나 ‘연행일기’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북경까지의 왕복 여정을 일기체로 쓰고 있다. 그러나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경유해 열하에 갔다가 북경에 되돌아 올 때까지 여정을 다루되,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절제할 것은 절제하고, 필요한 것은 구체화해 상세하게 썼다. 연암이 특히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실생활에 이롭게 쓰이는 문물과 기술에 대한 것이었다.
26권 10책으로 구성된 ‘열하일기’는 집중 호우로 불어난 압록강물의 장관으로부터 시작해서, 열하에 가서도 도도하면서도 거센 열하의 물에서 받은 충격을 나타냄으로써 이미지를 통일시키고 있다. 독창성이 돋보이는 또 하나는 여행 도중에 창작한 작품을 여행기 속에 넣었다는 점이다. 가령 한문소설 ‘허생전’이나 ‘산장잡기(山莊雜記)’ 중에 있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같은 작품이 그러한 보기이다.
또한 풍자와 해학이 담긴 ‘호질(虎叱)’이라는 글도 수록돼 있다. 춘추시대 풍기가 문란했던 정나라를 배경으로, 타락한 유학자 북곽선생이 동네 과부와 밀회 중에 들켜 도망치다가 범을 만나서 준열한 꾸중을 듣는 이야기인데, 양반사회의 위선과 모순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담겨 있다.
이처럼 ‘열하일기’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시하는 연암의 실학사상이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서이자, 소설가이자 문장가로서의 명문이 실린 작품집이라는 데 큰 가치가 있다.
1) 철저한 자료수집과 기록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쓰려고 이 여정에 오르기 전과 도중에, 그리고 여행을 마친 뒤에도 실로 많은 조사활동을 전개한다. 견문을 기록하고, 비망록을 만들고, 많은 서적을 발췌하고, 금석문을 조사하고, 시문을 창작하고, 필담(筆談) 초고를 버리지 않고 모두 수집했다. 북경의 유리창 서가에 꽂혀 있는 서적목록, 공문서 내용, 연희(演戱)에 관한 기록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기록하고 수집했다. 연암이 귀국할 때 큰 보따리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는 모두 그런 종이 쪽지뿐이어서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암 박지원은 사물을 바라보는 눈아 남달랐으며, 뜻밖에 다가오는 여정의 변화를 고통이나 불만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좋은 기회로 승화시켰다. 떠나기 전 여행준비를 철저히 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응할 수 있도록 했으며, 여행 뒤 여행기를 쓸 때를 대비해 충분한 자료를 확보했다. 이는 형제들과, 그의 수집벽과 기록벽을 잘 이해하고 협조해준 일행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그가 여행기 한 편으로 그렇듯 성가(成家)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나 요행이 아니며 엄청난 노력과 뛰어난 안목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여행을 통해 그의 실학사상은 한층 더 깊이 있게 발전돼 갔던 것이다.
6. 박지원의 문학관
연암은 실학자다. 그는 성리학에 대한 반동으로 실학이 생겨났다는 입장에 서는 인물이긴 하지만, 성리학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그는 주자를 추켜세웠으며 율곡의 성리설을 추종하기도 했다. 그는 유학자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입장에서 성리학의 모순과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고 이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논쟁거리로 등장한 데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고, 청나라의 과학적 문물과 합리적 학문 태도를 받아들여 점진적인 개혁을 도모하려는 현실주의자였다.
문장은 寫意(사의)에 그쳐야지, 망상이나 가식이 스며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위주의 문장론을 연암은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글로써 놀이를 일삼는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반성과 또 한편으로 불우한 처지에서 그릇된 사회를 해학과 기지로 조롱하고 풍자하는 태도를 보인 점인데, 이는 바로 모순된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그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연암 박지원은 고문을 반박하면서 참다운 문학의 질은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연암에 있어서 풍자란 중세적 봉건사회가 무너져 가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 역사적 변화의 시대에 살면서 그 모든 추이들을 직시했던 비판적 태도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의식 세계를 확장하면서 당대 평민층의 삶과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뛰어난 소설적 성과를 이룩했다.
≪참고문헌≫
燕巖集, 燕巖小說硏究(李家源, 乙酉文化社, 1965),
韓國小說硏究(李在秀, 宣明文化社, 1969), 燕巖小說의 近代的 性格(金一根, 慶北大學校論文集 第一輯, 1956),
燕巖小說考(李源周, 語文學 15, 196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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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25
  • 저작시기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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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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