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와 풍수도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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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교와 풍수도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도교사상
1) 고려 도교의 수용과 전래
2) 도교 사상의 확산
2. 풍수지리․도참사상
1) 풍수지리설의 정의와 기원
2) 풍수지리․도참사상의 추이

결론

본문내용

여 10조 제 5훈에는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順調)하여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된다고도 하였다. 이 곳은 이미 태조 26년(943)에 풍수지리설상 ‘대업만대(大業萬代)’의 땅으로 국왕 순주지(巡駐地)로 지목된 곳이며, 정종 2년(947)에는 지리도참설에 의한 천도지로서 궁궐을 짓는 역사까지 착수되었으나 정종의 붕어로 그 실현을 보지 못한 적도 있다. 또한 광종 11년(959)에 개경을 황도(皇都)로 고침과 더불어 서도로 개칭되고, 그 후에 서경, 호경(鎬京)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역대 제왕들도 지리도참설을 신봉하여 자주 서경에 순주하고, 옛 궁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서경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된 것은 인종 대에 승 묘청(妙淸)과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등이 들고 나온 상경인 개경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 및 서경의 지덕설(地德說), 그리고 뒤이어 서경 천도를 중심으로 발발한 묘청의 난 때문이다. 이 난은 인종 6년(1127) 묘청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 즉 이자겸의 변란으로 인한 개경 궁궐의 전소(全燒)와 잦은 천재지변을 구실로 삼아 서경에 궁궐을 세우고 이어(移御)하기를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건의에서 나온 풍수개념이 「대화세(大華勢)」이다. 화(華)는 화(花)로도 쓰는데, 산과 물이 모여들어 길길(吉格)을 이루는 명당터를 흔히 화세(火勢) 혹은 화혈(花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땅의 명당 모양을 꽃에 비유하여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경우인가를 표현하는 형국론적 방법으로, 인종 7년에 임원역(林原驛)에 대화신궁(大花新宮)이 낙성되었으며, 묘청은 서경천도운동을 버리다가 개경에 있는 유신들의 배척을 받게 되자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 반란의 결과, 서경기사도(西京畿四道)라는 행정구역 명호가 해체되어 6현(縣)이 되었고, 국왕 순주지(巡駐地)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명종 이후부터는 전래의 3신사상과 산악숭배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거리상 개경 가까이 위치한 삼소(三蘇=三山)를 신산(神山)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풍수지리 도참에 부응하는 길지로 중시하여 여러 차례 상지하고 궁궐을 조성하며, 천도의 후보지로까지 논의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결론
고려 도교의 전체적인 면모를 사상사에 입각해서 볼 때, 북송의 성립도교를 수용한 예종 5년(1110)을 경계로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으며, 안향(安珦)(1243~1306)이 성리학을 도입함(1286)으로써 사상계의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 초 도교의 존재를 알려주는 구요당이 세 시기의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재초를 시행하며 도교의 맥을 이었으나 재초의 체계화 단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예종은 북송의 성립도교를 수용하여 과의도교(科儀道敎)를 확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재초소로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고려의 대표적인 도관으로 도교 전개에 있어서 하나의 시기 구분이 가능케 할 정도의 일대의 사건이었으며, 이중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복원궁이 마련되고 계단(戒壇)이 설치되면서 도사가 배출되고, 각종 재초과의(齋醮科儀)가 정비설행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예종 때에 도교를 장려한 결과 인종 9년에 이르러서는 노장학을 금지시킬 정도로 도교사상이 풍미했다. 제 3기에 이르러 전대로부터 전승된 기복신앙에 대한 유신(儒臣)들의 비판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말의 사상적 전개에서 삼교정족(三敎鼎足)의 치세관이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복적 호국산앙으로서 불교와 함께 이단으로 배척되나, 성리학의 이론 전개과정에서 도교를 주기(主氣)의 양생이념(養生理念)으로 인식하여 3교사상을 바탕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이 삼교사상(三敎思想)은 조선시대의 삼교회통사상(三敎會通思想)으로 계승 발전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결부된 풍수도참설이 크게 유행하여 일반 백성들의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 왕실이나 중앙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정치적 대립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신라 말기의 선승인 도선(道詵)에 그 연원을 두었던 풍수도참설을 풍수지리설과 불교가 복합된 비보사탑설 및 국도(國都)의 선정과 관련된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일찍이 태조 대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주목받고 있었다. 태조의「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찰 창건에서의 위치 선정이라던가, 끝까지 반항하던 후백제의 옛 땅을 배역처(背逆處)로 규정한 것 등에서 풍수도참설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의 서경에 대한 풍수지리적인 설명과 그 중요성의 강조는 그 뒤 줄곧 북진정책의 하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며, 때로는 유교정치이념의 보수화에 반발하면서 정치군사면세 크게 영향을 미쳐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정치 싸움에 이용되었다. 인종 때의 서경 천도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묘청의 난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고려 중기에 와서는 북진정책의 좌절과 아울러 서경 대신에 새로 남경, 즉 지금의 서울 일원에 대한 풍수지리설이 대두하여 고려가 망할 때까지 자주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남경에 대한 풍수지리설은 서경에 대한 그것과는 달리 한강이 지닌 인문지리에서의 가치가 점차 중요성을 띠게 된 반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도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은 나말여초의 사회적 전환기에 나타나 고려시대의 유교와 불교 사이에서도 사회정치문화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다룬 사상들은 고려시대가 끝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선 왕조에서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앞으로도 도교와 풍수도참사상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실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아진다.
<참고문헌>
한국사16(1994),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문화사
http://koreacoc.hypermart.net/heresy/4004.htm
http://mirnara.com/culture/culture01.htm
http://guilbut.netian.com/do-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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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4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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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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