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테러리스트인가, 공산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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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 김구와 한국독립당 연구사

2. 백범 김구는
(1) 김구의 생애
(2) 김구의 정치사상
1. 민족주의
2. 자유민주주의
3. 문화국가주의

3. 해방 이전 백범의 의열투쟁

4. 해방 이후 백범의 활동 :남북연석회의 전까지

5. 남북연석회의
(1) 남북연석회의 제안 이전
(2) 유엔임시위원단의 방한과 김구의 방향이전
(3) 남북연석회의

6.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협의라는 인식이 대중의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48년 2월 16일 김규식과 김구는 북쪽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한을 보냈고, 북조선 민전에게서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를 반대하는 남북조선의 모든 사회단체대표들과 연석회의를 금년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 하는 답장을 받았다.
실제로는 4월 18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남북연석회의는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남북 지도자 협의회’ 그리고,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으로 구성된 四金회의로 구성되어 있다.
남북 대표자회의는 사실상 북한과 좌익이 주도하였으며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소극적으로 참여했다. 4월 19일에는 김일성의 요구로 하루 휴회하였고, 4월 21일에 속개되었으나 김구는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 대표들이 도착할 때까지 남북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4월 21일 제 2차 회의 때도 남한의 우익세력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4월 22일 김구가 기다리던 일행이 도착했고, 김구는 간단하게 축사를 발표하였다. 이 축사에서도 그는 확고하게 단정단선을 주장하고 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한 최대 과업은 통일독립의 戰取인 것입니다. 그런데 目下에 있어서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최대 장애는 단정단선입니다. 그러므로 現下에 있어서 우리들의 공동한 투쟁 목표는 단정단선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보다 남북 요인회담에 더 기대를 걸었다. 요인회담에서도 특히 의미 있는 四金회의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들의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고,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의 공동 성명서를 승인하였다. 공동 성명서의 핵심적 내용은 미소 양군 철수, 북한의 남침에 대한 우려 불식, 전국 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남한의 단선, 단정 반대로 요약할 수 있다.
공동성명서는 5월 1일 평양방송을 통해 보도되었고, 남한 신문에는 5월 3일자로 보도되었다. 남북연석회의에 대표를 보낸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들은 좌, 우를 불문하고 전반적으로 지지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지지가 남로당뿐만 아니라 중도파, 더 나아가 우익세력에까지 확대되어 대중적지지 분위기가 고양되자 미군정은 남북협상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들 협상파들의 북행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남한의 지도자들을 ‘착각을 가진 사람’ ‘공산주의자’ ‘용공주의자’로 몰아세웠다. 하지는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한 단체를 ①소련 당국의 후원을 받고, 또 전적으로 승인을 받은 북한의 정당 ②폭동,살인,방화,파업을 지령 또는 감행하여 왔던 남한의 ‘民戰 傘下 집단’ ③공산당의 조종 아래에 있는 餘黨 ④‘유일한 예외’로 김규식과 김구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자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유일한 예외’인 민족주의자들은 소련 및 공산당의 모략에 빠진 것이며 김규식과 김구는 ‘공산당의 포로’라고 비난하였다. 미당국의 이러한 입장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조선민주당, 남조선과도정부정무위원회 등 남한의 단정 세력의 입장과 일치되는 것이었다.
미당국은 김규식과 김구를 방문하여 선거와 정부수립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다. 두 사람의 남북연석회의 참석한 이유를 남한에서의 정치적 실패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연석회의는 대중적인 요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현실 정치를 뛰어 넘는 민족주의와 통일운동을 고려해야 한다.
남북연석회의는 남한 단독선거 추진으로 남북분단이 현실화되자 남하내의 모든 反단정 세력이 참가하여, 남북 민중의 대중적지지 속에서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남북의 통일정부 건설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단독선거 보이콧과 단독선거의 부당성을 알리는 폭로선전을 실행할 것을 결정하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였으나 남쪽만의 단선을 완전히 저지하지 못했다. 결국에 통일정부 수립과 양군철퇴를 주장하던 김구는 암살되었고, 진보적 국회의원들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탄압을 받았다.
6. 나가며
일제에 대한 의열 투쟁 과정과 해방이후의 테러 활동에 김구가 가담한 것으로 보아,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치 노선을 바꾸어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것만을 가지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익 민족주의자였다. 해방 이후의 대북타격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남북연석회의에서도 좌익 쪽의 제안에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것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운 것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었다. 그들은 남한 만의 단정을 원했기 때문에 통일국가를 설립하려는 김구는 정적(政敵)이었다.
김구와 한독당은 뚜렷한 이념 노선이 없었고 임정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여 여러 가지 단면들을 보인다. 그러나 후에 김규식과의 합작으로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한 것은 이승만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자신이 우익진영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민족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느꼈던 것도 분명한 이유라 생각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일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범 김구는 여러 모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인물이어서, 통일국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암살당한 실패한 테러리스트이다.
참고문헌
강만길 외, 한국사, 한길사, 1994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역사비평사, 1991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도진순,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신병식,「한국현대사와 제3의 길 - 여운형, 김구, 조봉암의 노선을 중심으로 -」, 한국정치학회, 2000
양상완, 「이승만, 김구의 정치이념과 통일노선 」, 『북한』, 북한연구소, 1991
정경환, 「백범김구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 민족주의론과 민주주의론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98
김광주, ‘김구’, 이성회외(편), 『한국인물사8:현대의 인물Ⅰ』, 양우당, 1983
『민족문화대백과 사전』김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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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6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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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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