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백범 기념관'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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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백범 기념관'을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서는 9월 조선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어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남북협상
김구는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을 역설하며, 1948년 1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유엔의 협조하에 남북회담에 의한 총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한 2월에는 남북한 두개의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 독립의 실현을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1948년 2월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하였다. 이어 3월 12일에는 김규식ㆍ조소앙ㆍ조완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으로 민족 자결의 실현을 제시한 "7거두 성명"을 발표하였다. 3월 25일에는 북한이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의 개최를 발표하였다.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북행길에 올랐다.
4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2일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남북요인회담에서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을 결의, 공동 발표하였으며, 이 공동성명서는 이후 통일의 지표가 되었다. 이러한 회의 결과에 만족한 김구와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와 남북 통일에 대한 희망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고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통일운동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1948년 6월 북한에서 정부수립의 의사를 밝히며 동의를 요청하자, 김구는 이를 단호히 반대하면서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7월 김규식과 통일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친미 친소보다 우리 조국과 친하여 통일단결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북한에 두개의 정부가 수립되자, 분단과 이에 의한 동족상잔을 예상한 김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조국통일의 의지를 다졌다. 1949년 1월 신년사에서 "우리 3천만 절대다수의 유일한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라 밝히며 통일의 염원을 재확인하였고, 자주적 민족정신에 입각한 통일국가 건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조국통일의 염원을 간직한 채 서거하였다.
인재양성
김구는 1945년 11월 환국하여 삼균주의에 바탕한 교육의 균등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1947년 3월 완전독립과 평화통일을 추진할 유능한 인재를 단기간에 양성하기 위하여 건국실천원 양성소를 열고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1949년 1월에는 금호동의 전재민 거주지역에 백범학원을, 1949년 3월에는 염리동 천막촌에 창암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모자란 인재를 양성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며, 완전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는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한 선견지명의 결과였다.
서거와 추모
김구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미국은 미군정을 확대하고 남한단정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탁운동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당시 정세는 친일세력과 민족주의세력, 좌익과 우익, 정치인의 헤게모니 경쟁 등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어 갔다. 1948년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되자, 김구는 지속적으로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과 주체적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었다.
서거 후 40여년 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활동에서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 수뇌부에서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차원의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안두희는 배후조직의 하수인에 불과하였으며, 1차적인 배후조직은 당시의 군 수뇌부였다. 또한 이승만 역시 정권차원의 범죄라는 점에서 도의적 책임이 있으며, 암살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이를 호도하고자 직접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김구가 추구하였던 통일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암살사건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며
이번 답사를 통해 나는 백범 김구 선생의 조국 건설에 대한 그의 사상과 삶을 살펴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고난과 시련의 시기인 근대사와 현대사를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역사적 사실들을 보고 노트에 적어가며 그의 업적이 이렇게도 많고 대단했는가를 새삼 느끼면서 개인적으로 왜 우리나라의 다수의 사람들이 백범 김구 선생님을 가장 존경 하는지를 알게 해준 계기도 되었다.
기념관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지 기계들의 오작동도 없었고 실내와 실외 모두 깨끗했으며 김구의 일대기가 시대 순으로 정리 되어있어 보고 이해하기 쉬웠다. 또한 가까운 거리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와 백범 김구, 그리고 임시정부요인인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효창공원이 위치해 있어 백범 기념관을 관람한 후 가보기에도 아주 좋았다.
하지만 이번 백범 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물론 매직 비젼과 만화영화를 주 영상으로 하여 관람의 질을 높인 것은 좋은 의도였으나, 단체로 많은 인원이 관람할 시 배제 할 수 없는 소음문제에 대비하여 화면에 한글 자막을 넣거나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된 자막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한 배려가 되어있지 않아서 아쉬웠고, 기념품점 주변의 작은 공간 외엔 관람객들이 마땅히 쉴만한 곳이 마련되어있지 않았으며 다른 곳과 다름없이 기념관과 관련된 서적과 기념품들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또한 인적이 드문 장소에 설립되어 있어서 인지 기념관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삼의사의 묘가 안치되어있는 곳에는 관리가 허술하여 아이들이 묘지 근처에서 놀고 있는 안타까운 광경도 목격되었다.
부디 앞으로 시설이 많이 개선되고 관람하는 사람들도 수준 높은 관람의식을 가짐으로서 백범기념관이 더욱 더 좋아지고 발전하여 그의 사상과 의식이 현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널리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4.05.07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9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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