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문석봉의 유성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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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의병
(1)의병
(2)항일의병의 전개 과정
(3)항일의병 전쟁의 의의

2.유성의병
(1)유성의병의 전개
(2)유성의병의 이념
(3)유성의병의 의의

3.문석봉
-문석봉에 대한 자세한 소개/설명

본문내용

는 41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빈민자제 50여명에게 한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문인의 소양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또한 과천군의 포군장이 되기도 하다가, 43세 때에야 별시 무과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를 시작하였다. 문석봉은 오위장, 진잠현감 등을 역임하고, 이어서 1894년에는 양호소모사에 임명되어, 때마침 창궐하던 동학당을 진압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진잠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1895년 2월 문석봉은 신영 영장으로 근무하던 중 공주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켜 의병을 일으켜서 토왜하려고 한다는 고발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러한 문석봉의 의병투쟁은 을미사변 직후 재개되어 1895년 9월 18일 ‘공주(公州)의 유성(儒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문석봉의 학문적 특성을 살펴보면 그는 특정한 사승관계가 없이 아버지로부터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수학하였을 뿐이라 한다. 아버지 문하규는 시골 선비였으나 시집이 있을 정도의 한학에 대한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그는 주자학 정신에 기반한 충군애국정신에 철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문석봉은 을미사변을 ‘강상(綱常)의 대변(大變)’으로 인식하였으며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절의정신(節義精神)과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정신에 입각하여 국수(國讐)를 보복할 것을 결심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을 정벌하고 개화당을 토멸하고자 하는 척왜반개화론의 이념으로 거의하기에 이르렀다.
문석봉의 <영파재기(映波齋記)>는 그가 1891년 향리에서 후학에게 한학을 교육하기 위해 영파재를 건립하고 쓴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학교를 세우는 뜻은 효제충신(孝弟忠信)을 교육하고 인륜을 밝히어 교화를 행하고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그러나 지금 나라가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렀으며 스스로 부모 사랑하는 마음을 끊고 인륜이 사나운 물결처럼 무너지니, 누가 모든 냇물이 동쪽으로 흐름을 막을 것이며 황하가 탁해지니 누가 장차 조그만 아교풀로 이를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이러한 때에 ‘사도(斯道)’마저 식멸할까 두려워 영재파를 건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학문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가 무과출신의 무인이지만, 경학에 뜻을 두고 후학을 가르치고자 하였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석봉은 저서 <의산집(義山集)>이 있으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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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9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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