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학계의 칠지도에 관한 연구상황과 명문해석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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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칠지도(七支刀)에 대한 문제제기
1. 칠지도, 헌상이냐? 하사냐?
2. 칠지도 명문의 새로운 해석
3. 백제의 칼 칠지도와 천관우

Ⅱ. 석상신궁의 칠지도

Ⅲ. 칠지도 명문해석 고찰
1) 전면의 명문해석 고찰
2) 후면의 명문해석 고찰
3) 전.후면 명문의 관계

Ⅳ. 맺음말

본문내용

'聖音' 부분을 '聖晋'으로 판독하면서 동진을 백제와 왜의 양국사이에 개입시켜 놓고 칠지도 하사의 주체를 동진으로 본 것이다.
반면에 上田正昭는 상위자를 백제로 설정하였다. 그의 의견을 보면 "백제왕의 정치세력이 俟集하여 한층 높아진 때의 作刀이다. 그것도 그 명문의 형식은 하행문서의 형식이고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文言을 취하고 있다. 또 '왜왕에 供供'이라는 공공도 헌상의 의미보다는 공급의 의미라 할 것이다. 이 刀는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준 것이다. 명문의 어디에 헌상·봉헌·奉함·贈함의 의미가 있는가? 헌상한다면 상대를 우선 왜왕이라고 부를 리가 없지 않는가. 백제왕이 후왕이라 본 왜왕에게 하사한 刀라고 나는 본다."
) 金貞培, 〈七支刀 硏究의 새로운 方向〉, 《東洋學》제 10호, 단국대 부설 동양학연구소, 1980, pp.5∼6.
인데, 그는 후왕와 왜왕을 동일인으로 보고, 명문의 전면과 후면에 나타난 글을 서로 연결시켜 이해한 것이다. 이는 종래 일본학자들의 견해와 매우 다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神保公子는 명문의 전후면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고 '侯王'이라는 용어는 신분제도로서의 후왕이 아니라 吉祥句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후왕이라는 의미가 후왕처럼 신분이 높게 되거나 출세할 수 있다는 정도의 길상구라고 하더라도 천황에게 후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을까? 따라서 이 문구로 보더라도 이는 당시 왜의 지도자가 결국 후왕정도의 위치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명문에서 보여주는 후왕은 융통성 있는 해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후면의 기록과 무관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전후면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구가 있다. '先世以來 未有此刀' 부분인데 여기서 '此刀'는 분명히 전면에서 밝히고 있는 칠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先世以來로 倭에는 此刀, 즉 칠지도가 없었으며 백제로부터 이같은 종류의 도가 전해짐으로서 전혀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학계의 주장은 전·후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문구에 대해서는 단순한 길상구라 하여 그 의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칠지도 명문의 전후면은 서로 연결되며 하행문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어떠한 다른 해석이 나온다 하여도 백제가 칠지도를 왜에게 하사하였다는 것은 변함없는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Ⅳ. 맺음말
管政友로부터 시작된 七支刀 연구는 벌써 100년이 휠씬 넘어섰다. 칠지도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칠지도에 새겨져 있는 전후면 총 61자의 명문에 대한 해석이다. 이는 고대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료이며,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再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칠지도 명문해석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각자 상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명문의 판독에 있어서는 상당부분이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그 의미해석에 대해서는 서로 자국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어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학계는 전체적인 내용을 倭가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百濟獻上說적인 입장에서 칠지도를 해석하려 하였고, 이에 따라 연구가 계속 이어지면서 맹목적으로 헌상설을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東晋의 존재를 끌여들이면서까지 백제의 우위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백제가 사회, 경제, 문화적인 모든 면에 있어서 왜보다 우세하였다는 가정하에 百濟下賜說적인 입장에서 칠지도를 해석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국학계의 대립은 전체적인 칠지도 명문의 해석에 치중한 나머지 현재 남아 있는 명문 자체를 망각하게 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칠지도 연구는 지금까지도 매우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한국학계에 있어서 칠지도 연구가 한계성을 뛸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칠지도의 실제 모습을 접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고대사 연구가 다른 시대의 연구에 비해 어려운 이유도 실물을 접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미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칠지도를 국보라 하여 칠지도의 공개를 꺼리고 있다. 따라서 일본학계에서는 칠지도의 실물을 공개하여 보다 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칠지도는 어느 한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자기의 학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편협한 연구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며, 한일 양국학계가 서로 합동하여 각자의 연구를 비교하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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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3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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