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의 시대적 배경과 종류 및 양식의 변천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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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백자란

3. 조선백자의 성립과 시대배경

4. 조선백자의 종류
1) 순백자
2) 상감백자
3) 청화백자
4) 철회백자
5) 진사(동화)백자
6) 철채, 진사채, 청화채

5. 백자의 시대별 양식변천
1) 조선도자의 시기구분론
2) 조선 전기의 백자
3) 조선 중기의 백자
4) 조선 후기의 백자

6. 제작
1) 사옹원
2) 분원
3) 가마터

7. 조선백자의 의의

8. 마치며

< 참고문헌 >

본문내용

진 굽의 제기와 내저 중앙에 짙은 청화 안료로 ‘祭’ 또는 ‘福’ ‘壽’ 등의 문자를 써넣은 예들이 많이 발견된다. 받침은 굵은 흙이 섞인 내화토받침으로 굽다리 바닥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다.
광주 외에 기타 백자 가마터 - 경기도 산본지역 백자가마는 유물 출토 상황이나 백자 양식으로 보아 번천리 5호 가마와 거의 같거나 약간 이른 시기인 15세기 말에서 16세 전반경의 연대로 추정되며 가마 구조는 17세기로 비정되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 후곡리 백자 가마와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출토 유물은 대부분 아무 문양도 없는 백자인데 발, 접시 등의 일상 용기가 주를 이루며 특이한 점은 연질계 백자가 출토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전남 후곡리 백자가마는 그릇의 제작 수법이나 양식, 소성 방법 등으로 미루어 17세기 전반기에 이 지방에서 상용하기 위해 백자를 생산했던 가마이다. 출토된 도자기는 무문의 백자가 대다수며 간략한 초문이나 반추상화된 철회문으로 장식된 철회백자가 포함되어 있다.
용인군 원삼면 문촌리 가마터는 용인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가마터 중에 하나이며 가마유구가 무너져 있으며 정식 발굴이 행해지지 않았지만 퇴적되어 있는 많은 백자편으로 보아 활발한 생산활동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접과 접시를 주로 다수의 백자편이 수습되었으며 양식으로 보아 19세기의 가마터로 보인다.
7. 조선백자의 의의
조선도자기를 가리켜 소탈한 서민적 모습이 있다고 하고, 고려청자를 가리켜 귀족적 풍모가 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고려도자기와 조선도자기를 비교해서 그러한 표현이 고려청자와 조선분청사기와 백자에 적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전제주의국가에서 현대 민주주의국가에 이르는 첫 번째 점진적 중간단계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이고 다음 조선왕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고려시대에 백성들의 의지가 고대국가보다는 더 반영될 수 있었고 조선시대만큼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의미도 되고, 미술의 향유(문화생활의 향유)가 삼국시대의 국가중심에서 고려시대에 귀족중심으로 바뀌고, 조선시대에는 미술창조의 중심이 대중으로 이행되면서 대중도 세련된 미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고대 전제주의국가에서 왕권과 종교에 치우쳤던 권위주의 건축과 호화찬란한 공예도 통일신라시대에 그 규모와 양식이 한국의 자연과 문화환경에 맞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까지도 미술은 국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과 종교에 머물러 있었고, 신라 후기에 이르러서야 일부 지방호족 등에 미쳤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종전의 국가권위를 위한 것으로부터 왕실과 귀족·지방호족·승려 등 국가를 영위하는 인간을 위한 것으로 이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공예는 삼국시대의 호화찬란한 금관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시 최고로 세련된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귀족·지방호족들의 생활에 맞는 미적으로 세련된 공예품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미술의 특징은 생활공예의 세련이다.
한편, 조선시대는 미술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향유라는 관점에서도 고려시대보다는 현대에 성큼 다가선 시대였다. 고려시대의 왕실·귀족·승려·지방호족들의 세력이 끊어지고 조선시대에 새로운 무인 출신의 왕실, 새로운 양반계층, 새로운 유학자의 등장으로 민중이 넓게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조선조의 문화가 고려에 비하여 보다 우리문화의 참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조선조 미술의 특징 중 하나가 인위적인 기교가 나타나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민예적인 미에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이 널리 참여하여 그들의 소탈한 의지가 양반문인 계급의 미의식과 융화되어 표현된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한국인의 미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조 도자기의 특징 중의 하나도 이러한 인위적인 기교가 나타나지 않은, 마치 자연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8. 마치며
미술품들을 시대의 상징이라고 흔히 말한다. 회화·조각·공예 등이 가지고 있는 표정을 읽으며 그 시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특히 도자기는 그 시대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도자기는 회화나 조각에 비하여 시대분위기를 반영하는 속도가 느리다. 사람들이 늘 사용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격적인 변화는 어렵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이 도자기가 다른 것에 비하여 정제된 시대 정신과 문화를 반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과 함께 발달하기 시작하여 조선의 멸망까지 계승되어온 백자야말로 조선의 정신과 문화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도공들을 잃었고 근대에는 일본의 공장에서 제작된 백자에 의해서 자리를 내주고 말았지만 백자는 조선의 선비정신과 서민의 소박한 성심을 담고 있는 조선의 공예품이라 하겠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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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7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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