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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관

Ⅱ. 그리스의 정치와 경제
1. 정치
2. 경제

Ⅲ. 그리스 철학
1. 질료와 형상의 철학
2. 존재의 철학과 변화의 철학
3. 자연에서 인간으로
4. 근대 철학의 시작
1) 르네 상스기 철학
2) 합리론
3) 경험론

Ⅳ. 그리스의 전쟁
1. 전쟁의 영향
2. 그리스가 겪은 전쟁
3. 육전 - 중갑 보병들의 전쟁
4. 해전

본문내용

록 하고 그러한 기병공격을 돕기 위해 보병에게는 모루(저지부대)역할을 맡겨 적을 붙잡아놓도록 했다. 이후 주공과 조공의 구분 및 망치와 모루 전법은 모든 전략가들이나 군사 이론가들에게 기본상식이 되었다.
필리포스는 전술대형의 발전, 무기 개량, 여러 병종간 협동, 망치와 모루의 개념 확립 등 업적을 남겼으며, 정보 및 역정보 이용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상인들과 여행자, 그밖에 특수 스파이 등 정보 조직을 이용해 적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파악했다. 이런 행동은 과거의 그리스인들의 속임수, 스파이 등에 대해 명예롭지 못하다고 하여 공평한 조건에서 공개적으로 전투를 벌이려 했던 것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필리포스는 사전 정보 없이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행군할 때도 기병 정찰병을 먼저 내보내 적정을 살핀 다음에야 전술적 조치를 취했다. 또한 적을 기마하기 위해 수시로 역정보 작전을 폈다. 예를 들면 가짜 진군명령을 내리고 실제로는 부대를 다른 방향으로 진군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부대에 관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요 군사회의에 참가자를 극소수로 제한하고, 부대 주위에는 언제나 기병을 배치해 출입자를 철저히 통제했다.
필리포스의 통합군에 의해 새로운 전법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진군해오고 있다는 소식만 듣고도 다른 도시국가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구식 전법에 젖은 순박한 시민병들은 중기병만이 아닌 기병, 경보병, 궁병 등의 공격에도 당황했다 그들은 평지 아닌 산악에서 여러 날 전투를 치르는 것을 꺼렸으며, 정면대결 아닌 측후방 공격과 기만 및 역정보가 판치는 전장에서 예전처럼 목숨을 바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무릇 전쟁이란 새로운 전법에 잘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마련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과 페르시아 정복-전쟁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적 천재
역사상 그는 최고로 생산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존의 문명 세계를 다른 곳에 들어 올려놓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가 이룬 수준만큼의 업적은 다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탄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내린 평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이 짧은 생애 동안 이룬 업적은 하나의 전설과 같다. 특히 전쟁사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과 업적은 실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 받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군들도 약점을 보이게 마련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군사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완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필리포스 왕으로부터 최고의 군대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그의 밑에서 군사지휘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필리포스의 단순한 계승자 차원을 넘어서 전략 전술에서 페르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 세계의 어떤 선구자보다 앞서는 개념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필리포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각기 신 가문의 후손으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자신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즉, 필리포스의 선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이고 올리파아스의 선조는 아킬레스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어머니로부터 \"너는 제우스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사연인즉, 올림파아스는 결혼 전날에 벼락을 맞는 꿈을 꾸었는데, 그때 제우스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처음 아시아 땅으로 들어섰을 때 자신의 창을 땅에 힘차게 꽂으며 \"신들로부터 나는 아시아를 받아들이노라. 창으로 얻은 승리와 함께\"라고 소리쳤다. 아시아 원정은 아버지의 계획을 물려받은 일 이상으로서, 스스로는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생각했다. 페르시아 침공에 대해 복수하고, 소아시아 지방 그리스인들을 해방시키며, 나아가 아시아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으로 취임한 2년 후인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최고의 군대인 보병 32000명과 기병 5100을 거느리고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1차적 목표인 페르시아 점령을 위한 그의 전략 계획은 페르시아가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한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소아시아 지방을 정복하고, 이어서 그곳으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페르시아 해군기지를 장악해 페르시아 해군력을 무력화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해전을 실시하지 않고도 해군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단지 180척의 군함밖에 없는 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40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1차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4년이 소요되었다. 헬레스폰투스를 건너 소아시아에 진입했을 때 페르시아 왕조는 즉위한지 얼마 안되는 다리우스 3세 치하에서 혼란을 겪고 있어 알렉산드로스는 쉽게 교두보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는 친히 고대 트로이 유적을 방문하고 그의 시조 아킬레스의 무덤을 찾아가 예의를 갖췄다.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싸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싸움, 기원전 332년 티로스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비록 숫자는 많지만 여러 면에서 뒤떨어져 있던 페르시아 군대를 모두 물리치고 승리했다. 페르시아 군의 가장 큰 약점은 기병과 보병간 협조체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마케도니아 군은 필리포스가 개발한 보병과 기병의 협동을 기초로 하는 망치와 모루 전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 군은 먼저 보병 지원을 하지 못하는 페르시아 기병을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기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보병을 공격함으로써 적을 조직적으로 격파했다.
교두보를 확보하고 페르시아 해군을 무력화 시킨 다음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대전략 목표인 페르시아 군 궤멸과 대제국 건설을 위해 그의 군대를 계속 진군시켰다. 그는 다리우스의 평화제의를 거절하고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싸움(아르벨라 싸움이라고도 부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사실상 페르시아 군대를 거의 궤멸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끝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잡히기 전에 그의 측근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전지역을 정복하고 대왕으로서 페르시아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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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03
  • 저작시기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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