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의 한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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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하서 김인후의 한시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문

2. 생애와 사우관계

3. 시관

4. 시세계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고)
1) 서두
2) 산수심과 48영 제작
3) 48영에 표상된 소쇄원
4) 시적 형상화와 미학적 의미

5. 주제별 작품 분석
1) 풍류·자연과의 조화
2) 탈속(脫俗)과 지조(志操)
3) 교유(交遊)

6. 김인후 관련 자료

7. 결론

본문내용

광조와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때문에 하서는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조광조를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자들의 신원(伸寃)을 주청한 것은 이러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가 세자때 가르치고 인도하던 인종이 등극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신원되었으니 인종과 하서간의 묵계를 알만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다시 꽃을 피울수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가능성을 김인후 시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학문적으로 하서는 이기(理氣)를 포괄한 대심(大心)철학자다.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회통을 중시했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차원에서 교감했다.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심(心)은 일신만사(一身萬事)의 주재자다. 그러나 심만으로 주재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심에 내재한 이(理)를 타야만 주재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심을 정위(正位)시켜야 하는데 이 공부가 구방심(救方心), 입대본(立大本)의 경(敬)이요, 밝혀진 대심(大心·至理)을 다시 밖으로 확충해나가는 과정과 추진력이 수도요 지성(至誠)이다. 이 지성으로 진기성(盡己性)―인성(人性)―물성(物性)해서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상삼(相參)함으로써 우주생명의 대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는 부모요 인간은 형제며 만물은 동포다. 어찌 이물(異物)로 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순수감정으로 교류하고 사랑할 뿐이다. 천지를 슬퍼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정반(正反) 시비(是非) 득실(得失) 호오(好惡)가 가려질 것이니 여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하서가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도학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과정을 중시하는 김안국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조광조의 과격과 급진 그리고 고집과 배타 등의 약점을 보완하기에 넉넉하다. 유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영의 중심무대인 정치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특히 군왕과 의합(意合)해야 한다. 김인후는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춘 행운아였다. 성균관에서 퇴계(退溪)를 비롯한 많은 현능(賢能)들을 만났고 특히 스승의 배려로 세자 보덕(輔德·세자를 가르치던 벼슬)이 되어 다음 정권을 잡을 세자와 군신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서로 경애하고 의기투합했다. 이는 김인후가 장차 정치이상을 펼치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요, 절대적인 보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만복(滿腹)의 열정과 경륜, 신심과 희망은 인종이 1년도 못되어 승하함으로써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무엇으로 감당하랴. 그 후 그는 일찍이 모실 이를 잃어버린 청상(靑孀)으로 자처하며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에다 절의(節義)가 더해진다. 그는 시와 술로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다 병들어 50세를 일기로 통한의 생을 마쳤다. 다음은 그가 인종을 애원(哀怨)한 나머지 단장의 피를 토하면서 쓴 사모곡이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에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질 않네
세상사 흐르는 물 잊혀지련만
젊은 시절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머리 희고 이가 빠졌소
슬픔 속의 봄 가을 몇번이던가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있다오
백주는 옛대로 물가에 있고
고사리는 해마다 돋아납니다
오히려 부럽구려 주나라 왕비
생이별이야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16세기 도학의 거봉 하서 김인후는 나이 다섯 살 때, 누군가 ‘하늘 천(天)’을 주제로 글을 지어보라 했다고 한다. 주저 없이 곧 읊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 하 크고 또 가물가물/넓고 넓고 비어 비어 / 지구 가를 둘렀도다 / 덮어주는 그 중간에 / 만물이 다 들었는데 / 이 땅 사람이 어찌하여 / 무너질까 걱정했지”.
이처럼 하서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남긴 작품만 무려 1천6백여 편. 그러나 그의 시성(詩性)은 그저 개인적 천품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호남 강호가도(江湖歌道) 시단의 독특한 미적 정서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분을 함께 표출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하서가 본격적으로 시에 몰두한 것은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속세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칩거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인종 승하 이후 매년 인종의 기일이 돌아오면 고향집 뒷산에 올라 술 한 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돌아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임금의 폭정을 피해 고향에 침거하면서 집안 다스리기를 나라 다스리듯 했던 냉철한 선비 하서 김인후. 지식과 행동 내면과 외면의 수양을 다같이 중시한 그는 ‘행(行)에 열심이고 지(知)에 간략하며 안에 소홀하고 밖에 힘쓰는’ 선비들을 자주 꾸중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1,600수의 시를 보면 침묵의 언어를 알 것 같다. 준엄한 언어로 인간 내부에 잠적된 영혼의 육신을 회생시키는가 하면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의 훈육으로 존재의 깊은 심연을 느끼게 한다.
김인후의 도덕성과 절개, 고집과 사상, 빛나는 문장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과제를 마무리한다.
<참고서적 및 논문>
김인후, 하서전집, 민족문화추진회, 1989.
김병주, 하서 김인후의 사상과 문학, 사단법인 하서기념회, 2000
광주광역시, 하서 김인후의 도학과 문학사상,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5
정익섭, 호남가단에서의 하서 김인후의 위치, 동양학 제17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87.
이종건, 소쇄원사십팔영고, 어문집 제6권, 마산대, 1984.
이민홍, 조선전기 자연미의 추구와 한시, 한국한문학연구 제15집,한국한문학연구회, 1992.
이창헌, 하서 김인후의 시문학고, 동악한문학논집 제6집, 동악한문학회, 1992.
김상오, 하서 김인후의 생애와 문묘종향의 경위, 전북사학 제5집, 전북대학교,1982.
조기영, 하서 김인후의 시 연구, 연세대 박사 논문, 1991.
지종옥, 호남시조의 계보연구, 원광대 박사 논문, 1987.

키워드

하서,   김인후,   소쇄원,   48영,   한시,   전라도,   호남지방,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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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7.11
  • 저작시기2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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