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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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성장의 시간

제2부 어둠의 땅, 남아프리카

제3부 나의 일은 인도에 있다

제4부 사티아그라하, 끝없는 진리의 실험

제5부 구원과 투쟁, 다시 민중 속으로

본문내용

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상하여 반영(反英)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1934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 자리를 사임하고, 세바그람에 가서 살면서 농민을 교육하고, 하층민을 위해 투쟁하며, 교육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에 인도 국민 회의는 자치 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 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국민 회의파, 이슬람 동맹, 영국 정부 간의 3자 협상이 벌어졌으나 협상 중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1947년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었고, 양쪽으로부터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간디는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에 의해 1947년 9월 캘커타의 폭동이 가라앉았고, 1948년 1월에는 델리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라는 반(反)이슬람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인도인 가운데서도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간디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간디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많은 남녀노소 그리고 서구의 많은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종파로부터 애정과 충성을 받았다. 그는 분명히 정치 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주된 동인(動因)은 종교였으며 평생 평등과 비폭력의 사상을 일관되게 지켰다. 간디의 저서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표현되어 있는 서구의 물질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근대 국가에 대한 불신, 폭력에 대한 전면 거부는 기술 문명의 폐해와 평화의 위협으로 가득찬 현대 세계에서 점차 높이 평가되고 있다.
▣ 간디 연보
1869년 10월 2일,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카티아와르)에서 출생.
1882년 13세 때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결혼.
1888년 9월 4일,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오름, 『바가바드 기타』와 『성경』을 읽음.
1891년 런던 이너 템플 법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인도로 귀향. 뭄바이와 라지코트에서 법률사무소 개업. 유럽의 복장과 생활 양식을 즐김.
1893년 남아프리카로 향함. 인도 이주민들의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
1894년 나탈 인도인 의회를 설립. 인도인 선거권 박탈 법안에 대한 반대투쟁 개시.
1899년 보어 전쟁에서 영국인을 위해 인도인 위생병 부대를 만들어 종군.
1903년 요하네스버그에서 법률사무소 개업. 러스킨의 『이 나중 온 자에게도』를 읽고 크게 감명받음.
1904년 피닉스 정착촌 설립. 주간신문 <인디언 오피니언> 창간.
1906년 남아프리카 정부의 인종 차별적인 입법에 대항해 수동적 저항을 조직화하면서 비폭력 투쟁을 실시. 수차례에 걸쳐 투옥(~1914년).
1909년 7월 10일, 아시아인법 문제로 런던에 감. 11월, 남아프리카로 돌아옴. 첫 번째 저서 『힌드 스와라지』(인도의 자치) 발행. 몰리-민토개혁법 발표. 1910년 11월 20일, 톨스토이가 사망할 때까지 그와 서신을 교환함.
1910년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톨스토이 농장을 만들고 이상적 공산주의식 공동체 실험을 함. 번창하는 변호사 일을 포기하고 이 농장으로 이주.
1912년 모든 개인 재산을 포기하는 맹세를 함.
1915년 1월 9일, 22년 만에 귀국.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로서 환영을 받음. 5월 20일, 아메다바드에서 사바르마티 아슈람을 건립. 의복과 생활 양식을 부득이한 것만 제외하고 인도식으로 바꿈.
1920년 회장으로 피선되어 의회를 이끎. 남아프리카에서 전개했던 방법으로 영국의 지배에 대해 비폭력 투쟁 실시. 인도 가정의 물레 사용을 촉진하여 영국 직물을 배척(홈 스핀 사상). 비협조 운동을 벌임. 칼리프 복권 운동에서 이슬람교도와 협력함(~1934년).
1924년 1922년 선동죄로 6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 병으로 조기 석방됨. 칼리프 복권 운동이 와해됨.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긴장 상태가 고조됨. 두 종교 사이의 화해를 위해 21일 동안 단식.
1932년 1월 4일, 발라브바이 파텔과 함께 예라브다 감옥에 투옥. 힌두교인과 불가촉천민을 분리시킨 선거에 반대하며 ‘죽을 때까지’ 한다는 각오로 단식에 돌입. 9월 26일, 단식한 지 6일 후에 영국의 동의 아래 힌두교인과 불가촉천민 사이에 이른바 예라브다 협정이 체결되어 단식을 끝냄.
1934년 5월, 시민 불복종 운동 완전 정지. 국민의회의 지도부 자리를 사직. ‘건설적 프로그램’ 운동에 전념.
1935년 관직 없이 민중 운동 건립에 전념(~1939년).
1940년 6월, 간디, 국민의회에서 물러났다가 8월에 다시 복귀. 참전 반대와 개인적 불복종 운동 전개. 군비 계획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
1943년 영국 통치로부터 인도의 자유를 얻기 위해 찬드라 보세는 일본과 연합하여 ‘인도 국민국’ 창설.
1947년 6월 3일,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 리가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리를 발표. 국민의회와 이슬람 동맹이 이에 동의. 간디는 이를 ‘정신적 비극’이라고 칭함. 8월 15일, 두 국가는 분할 독립을 획득. 9월 1일, 칼리카타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화해를 위해 단식.
1948년 1월 20일, 뉴델리에서 간디를 노리는 폭탄 테러 발생. 1월 30일, 힌두교 광신자인 나투람 고드세에 의해 뉴델리에서 암살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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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7.20
  • 저작시기2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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