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료 속의 왜구의 침략과 독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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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사료 속의 왜구의 침략과 독도문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 사료에서 찾아본 왜구의 침략
삼국 시대(삼국사기)
고려 시대(고려사)
조선 시대(조선왕조 실록)

Ⅲ. 독도 역사 & 문제

Ⅳ. 결론

참고 문헌

※ 일본 왜구 역사왜곡

※ 일본 독도인정 사료관련 신문 기사

본문내용

일본서적신사의 교과서처럼 ‘왜구는 이키(??)나 대마도 등을 근거지로 한 일본인이었다’고 제대로 서술한 것도 있지만, 일본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는 도쿄서적 교과서에서도 ‘왜구 가운데는 일본인 이외의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연막을 친다.
교류관계사의 시각에서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각을 달리한다고 하여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왜구가 대마도와 일기 등지의 민중, 악당이나 악당화한 규슈 사이고쿠의 무사들이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 오사카 유지 교수, "독도는 조선 땅" 고문서 공개-6/16일
“일본의 독도 편입 주장은 속임수” 지적
“일본이 1905년에 독도를 강제적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배경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도명 혼란과 법을 교묘히 이용한 침략적 행동이 있었다.”
<일본 고지도에 독도 없다>라는 책으로 일약 ‘독도 지킴이’로 알려진 오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15일 한 국내학술대회에서 거듭 “일본의 시네마현 독도 편입사는 당시 지명 혼란을 이용한 은폐와 왜곡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지난 2004년 귀화한 오사카 유지 교수는 도쿄대 공학부를 졸업한 이후 2001년부터 한일 근대사에 천착해 국내 학계에서는 취약한 일본의 고문서, 고지도 중심의 연구를 계속해왔다.
그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연구가 상당히 왜곡되고 은폐된 반면 한국은 많은 자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학계의 비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일 양쪽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의 독도점유권 주장 이해하려면 메이지 시대 도명 혼란 이해 필요”
유지 교수는 15일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소장 이재형)가 주관한 ‘독도문제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대응전략’ 학술대회에서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 영토’라고 밝힌 1877년 태정관 지령문을 중심으로 발표를 진행했다.
태정관은 메이지 시대에서 내각의 역할을 했던 당시 막강한 권위를 갖고 있던 기관. 유지 교수가 지난 5월 최초 공개한 1877년 메이지 시대의 공식문서가 바로 태정관이 ‘독도는 한국 땅’임을 공식으로 인정한 문서다.
유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 내무성은 전국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 전국의 지적조사를 각 현에 지시했다. 이때 시네마현은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던 울릉도와 독도를 지적 조사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내무성에 문의했고 내무성은 태령관에 자문을 구했다.
이에 태령관은 자체 조사에 나섰고 1877년 3월 29일 내무성에 “다케시마 외일도는 1699년에 조선과 구 일본정부(에도막부)간에 왕래가 끝나 본방(일본)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명심할 것”이라는 내용의 지령문을 내려 보낸다.
1877년 태정관 지령문 “울릉도와 독도 조선 땅임을 명심하라”
당시 일본 내각이 직접 다케시마(울릉도)와 외일도(독도)가 에도막부 시절부터 일본영토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그로부터 18년 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선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독도를 무인도로 규정하고 원래 울릉도의 명칭이었던 다케시마를 독도의 일본 명으로 정해 시네마현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유지 교수는 이 같은 일본정부의 독도 편입을 ‘메이지 시대의 잘못된 서양 지도로 인한 도명 혼란’과 ‘강화도 조약, 조일양국통어규칙’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도명에 혼란을 일으켰다. 17세기 유럽에서 유입된 지도에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세 개의 섬이 기록되어있다.
유럽인들이 울릉도를 중복으로 기재해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다케시마, 마츠시마로 혼용해 기재하는 지도를 작성하는 등 두 섬에 대한 정확한 지명을 확립하지 못했다.
유지 교수는 “한때 유럽지도와 일본지도에는 세 개의 섬이 중복으로 명시되는 등 일본인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며 “이 사실은 일본이 17세기 중반에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일본정부의 견해가 허구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일본인들의 지명 혼란은 1905년 일본 정부가 1877년 당시의 공식문서를 철저히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1880년 이후 일본은 울릉도를 다케시마라는 지명 대신 마츠시마로 바꿔 불렀고 독도를 량꼬토라고 부르는 습관이 정착됐고 이를 빌미로 독도를 일본의 고지도에 존재하는 다케시마라고 이름 붙였다.
지명의 혼란을 이용해 독도를 고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섬으로 전락시키고 무인도로 규정한 후 자신들이 익숙했던 지명을 붙임으로써 마치 일본에 의해 처음으로 영토를 인정받는 섬으로 만들어 버린 것.
또한 1876년에 일본이 강제체결한 강화도 조약은 동해지역을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어 국제법상 실효지배 행위에 해당하는 측량행위를 가능케 했다.
유지 교수 “독도는 법적 문제에 앞서는 역사적 문제”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정부는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인한 사실상의 동해 강점상태를 이용 이름만 교묘히 바꾸는 속임수를 통해 독도를 강제 편입시킨 것”이라며 “이것이 침략과정에서 독도가 일본에 불법 편입된 진상”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이 최근 들어 펴내는 독도 관련 연구서에는 독도의 조선 영토를 정부 차원에서 확인해주는 1877년 태정관 공문서나 내무성 공문서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유지 교수는 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주도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두 문서를 은폐하거나 왜곡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05년의 일본의 독도편입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면 독도영유권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대립을 완화시킬수 없다”며 “악법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일본에 대해 우리는 법적인 문제에 앞서 역사적 문제임을 강조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역사적 문제를 강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의 이면에 숨어있는 일본인들의 악법을 이용한 침략행위, 현재의 은폐.왜곡 행위를 정확히 따질 때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한반도에 대한 약탈행위의 사실에 눈 뜨고 더 이상의 영유권 주장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최병성 기자 (1895cbs@views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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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15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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