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 허균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서론
허균이 살았던 시대
허균의 생애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할 것이다” : 성장기 / 수학기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 관직 등용기
“한 세상에 알아주는 사람 없다 한탄 마소” : 사상 및 문집 정리기
<유재론(遺才論)>
「손곡산인전」
「엄처사전」
<호민론(豪民論)>
「남궁선생전」
「장생전」
「장산인전」
“우습기만 하구나 밭도 없는 이 나그네” : 정치의 길과 몰락
결론

본문내용

력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할 순 없다. 즉, 후궁 소생으로 정당성면에서 취약성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과 이이첨 등의 세력에겐 정비 인목대비의 적출인 영창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과 시점에서 당시 지배체제에 울분을 토하고 ‘무륜(無倫)을 표방하며 범죄를 저지른 칠서들은 영창의 제거를 위한 역모조작극의 희생물이 되기에 적시타와도 같은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유병환, <홍길동전>의 형성 배경, 공주대학교 교수
‘칠서의 난’과 허균의 관계는 그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상관관계를 가지지만 허균이 역모를 실제로 계획하고 실천하려 했는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당시 허균은 역모가담 여부에 대하여 사실관계를 강력히 부정하고 신변의 위협을 축소하기 위해 당시 권력가인 이이첨과 더욱 가까이 하게 된다.
46세 이후 호조참의가 되고,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다녀오게 된다. 이 때 중국서적 가운데 우리 역사에 대한 모욕 기사가 있음을 보고한 후 마침내 중국에 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귀국하여 광해군의 신임을 받게 된다. 48세에 필서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하급관직을 맡게 되지만 49세에 다시 형조판서가 된다. 이 후 허균은 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사실 인목대비 폐모론은 허균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사건이다. 폐모론은 광해군 5년에 있었던 김제남 사건 심문과정 중 유교칠신의 일원이었던 박동량이 인목대비의 선조에 대한 저주사를 털어놓으면서 시작되었다. 인목대비가 서인과 가까운 측면이 있고, 당시 정쟁이 한 창이었던 때를 감안한다면, 단순히 정치적인 싸움으로 볼 수 있겠지만, 심층적으로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폐모론은 인목대비가 역모의 주체라는 전제 위에서 거론되었으므로, 역모의 사실 여부를 넘어, 일단은 역모에 관련한 법률 일반으로 다룰 일이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형식상으로는 광해군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사안 자체가 아주 특별했다. 국법으로 역모사를 다루면서도 군주와 어머니 사이를 고려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쟁점을 바탕으로 이이첨과 허균의 대북파는 인목대비를 폐모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영의정 기사헌 등은 모자관계는 유교의 근본이념인 효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군주의 효성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섬김과 봉양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종묘 사직을 보존할 때 실현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 것이 폐모론자들이었다. 이러한 주장 속의 허균의 생각은 국가와 사가의 질서는 다르다는 것, 국가의 질서를 해치는 행위가 나타날 때는, 그 어떤 점보다 국가라는 정치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그것이 곧 의를 실행하고 공법을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절의의 도덕성에 기초한 정치론의 절대화를 부정했던 사고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 해 12월 폐모론에 소극적이었던 영의정 기자헌은 탄핵을 받게 되고 귀양을 가게 된다. 이에 그의 아들 기준격(예조좌랑)은 자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허균의 혁명 계획을 고발하는 내용의 비밀 상소를 올린다. 허균 역시 자신을 변명하는 비밀 상소를 올리게 되며 기준격과 허균의 대립이 시작된다. 허균이 50세가 되던 해 3월에는 같은 주장을 폈던 이이참과 방법 면에서 대립각을 세우게 되고 4월에는 진사 곽영 주도로 허균을 탄핵하는 상소가 나왔으며 이는 기준격의 상소로 이어지게 된다. 8월 ‘흉방 사건(남대문에 격문이 붙은 사건)’이 일어난다. 흉방을 보았다고 전한 허균의 심복 하인준이 잡혀 둘어가게 되고, 기준격과 허균을 동시에 문초하게 되며 대질 신문한다. 그리고 그 외 허균과 관련된 우경방, 현응민, 김윤황, 하인준이 흉격 사건과 흉방 사건을 자백한다. 24일 광해군이 인정전에 나아가 친히 허균의 심복들을 국문하게 되고, 이이첨 등의 대신들은 허균의 진술을 막기 위해 망설이는 광해군에게 허균을 빨리 사형에 처하라고 다그친다. 8월 24일, 허균은 결안도 없이 그의 동지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처형당했다.
결론
교산 허균(1569~1618)은 문장가로 문명이 높았던 허엽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큰형의 문장이 간결하면서 무게가 있었으며, 작은형의 학문은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高孤)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고 하였다. 또한 누님의 시는 더욱 밝으면서 씩씩하고, 높으면서 아름답다고 하였다. 이렇듯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허균은 어린 나이부터 총명한 자질을 드러내었고, 손곡 이달에게서 본격적으로 시를 배우게 된다. 허균의 5전과 「홍길동전」에서도 드러나는 허균의 사상은 그의 스승 이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장은 뛰어났지만 서얼이기에 현실에서 소외되고 불우한 삶을 살았던 이달을 보며 사회제도의 모순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유재론>에서 적서차별을 없앨 것을 주장하였으며, <호민론>에서는 그의 혁명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5전과 「홍길동전」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혁명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허균이 혁명가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허균이 칠서의 난을 배후조종했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신하된 자로서의 충을 중시했던 그가 실제로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말이 가볍고 국량도 좁아서 용납하고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강석을 모시거나, 혹은 말할 땅에 참여한다면 유고하고 탄핵하는 즈음에 있어, 툭하면 반드시 임금이나 정승에게 죄를 얻어, 크게는 멀리 귀양가거나 죽게 될 것이고, 작게는 관직에서 삭출되고 말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입니다.
그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바른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며 남의 잘못을 쉽사리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글 속에 나타난 혁명적인 사상들은 당시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홍길동전」으로 잘 알려진 허균. 그는 신분의 제약 때문에 인재를 등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적서차별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실제로 혁명을 일으켰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그의 혁명적인 사상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며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7.11.01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466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