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 고려사회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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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문벌귀족과 귀족정치

◆고려사회의 성격논쟁

◆귀족제사회설

◆관료제 사회설

◆결론

본문내용

문벌에 의해 제약된 사회이며, 관료제가 좀 더 발전한 조선 양반사회 성립의 전단계라고 보았다. 따라서 신라나 조선도 귀족제 사회라 할 수 있으나 엄격히 말하면 흔히 문벌귀족으로 구별하여 부르는 고려의 귀족만이 역사적으로 귀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고려 귀족사회는 한국 역사발전의 하나의 시대적 단계였다고 주장하였다.
막스웨버의 가산관료제설을 고려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가산관료제 하에서는 관리가 노예와 하인과 같은 비 자유 관리이고 또 국왕과 개인의 사이에는 개인적인 종속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공식적인 관료선발 기능이 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임에도, 막스웨버는 과거가 교양시험이라는 이유로 과거 시행 여부를 무시한 채 동양사회를 가산관료제로 규정하였으므로, 그 이론을 적용한 고려 '가산관료제 사회설'은 문제가 있다. 연구 상의 문제점도 지적되었는데, 고려사 열전에 입전된 인물은 과거관료가 대부분이었다는 결론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전에서 추출된 음서출신자의 수효가 부정확하게 집계되었고, 또한 [고려사] 편자가 조선 관료체제하의 관인들이었기 때문에, 과거출신자들이 주로 열전에 수록되는 사료적 한계성도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결론
고려사회는 어떠한 사회였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논란이 되고 있는 대표적인 학설 두 가지로 관료제설과 귀족제 설이 있기에 전술 하였다. 관료제설은 신분보다는 보다 능력을 중시하고, 귀족제설은 능력보다는 신분을 더욱 강조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건국으로 고려 후기의 사회변화가 제도 속에 수용되어 문음 대상은 5품에서 2품 이상으로 대폭 축소된 반면, 과거를 통한 관료의 충원이 확대되어 문·무반을 중심으로 한 양반 관료사회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단계의 고려 곧 전기의 혈연적 사회와 후기의 능력 우대적인 상황을 동시에 구유하고 있는 사회 상태를 어떻게 성격 지어 적절한 단일 용어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학문적 토론으로 이어진 것이 귀족제설과 관료제설에 대한 학설 논쟁이며, 이러한 토론과정을 거침으로써 역사적 용어의 개념이 보다 분명하게 될 것이지만 고려사회 전체적으로 본다면 귀족제설이 더 무게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와 비교해 볼 때 분명 고려 시기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출생의 신분이 더 중요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통일신라기를 생각해 보면 골품제의 폐쇄적인 신분제에서 나아가 과거제의 등장 다른 여러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이 나타난 점을 미루어 볼 때 좀 더 개인의 능력이 중시된 사회로 나아간 감이 없지 않다. 즉 과도기적인 시기이기에 한마디로 정립하기가 힘든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제 사회와 관료제 사회로 나누어 진다고 말하는데 이 두 가지 이론은 다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에서 보든지 어느 이론하나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나는 어느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고려시대에 귀족제와 관료제 중에 귀족제가 좀 더 발전한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서제도와 공음전등 여러 고려시대의 제도를 보면 귀족의 신분유지를 위한 제도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과거제인데 물론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음서제와 공음전만으로는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제는 귀족제 사회의 바탕아래에 행해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과거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관한 것이다. 고려시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과거의 대표격인 제술업과 명경업에는 향리층 가운데서도 일정한 선 이상의 자손만이 응시가 가능하였고, 일반 양인과 향 부곡인들이 응시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잡과(雜科)의 경우는 일반양인 이상에게 개방되어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극복하고 잡과에 응시 급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과거제라는 것도 신분제의 바탕에 포함되는 것이기에 고려사회는 기본적으로 귀족제 사회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한충희, 2007, <<증보 한국중세사 1 - 고려시대>>
이기백, 1993, <<한국사의 재조명>>
박창희, 1984, <<한국사의 시각>>
유승원, 1997, <<고려사회를 귀족사회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기백, 1990, <<고려귀족사회의 형성>>
박용운, 1985, <<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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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7.12.28
  • 저작시기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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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4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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