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의 삶(무신정권기~일제전후까지 사회상과 조상들의 삶 및 주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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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① 무신정권기
② 원 간섭기
③ 조선 초기
- 백성의 유교화 / 삼강오륜
- 주자가례와 유교적 생활규범
- 여인들의 삶
- 유교와 민의 삶
- 성리학과 양반, 백성
④ 세종
- 공법제도와 농민
- 훈민정음 창제와 서민문화
- 과학기구
- 농업 기술
⑤ 선조
- 당쟁(붕당정치)
- 임진왜란
- 정유재란
⑥ 영조와 정조
- 탕평책 실시
- 신분변동
- 인구증가에 따른 도시화, 주택문제, 거지구휼
- 농민의 설움(병작제, 광작농, 항쟁)
- 광산으로 몰리는 농민들
- 상인들의 삶 (금난전권, 신해통공, 사상도고, 매점매석)
⑦ 고종
- 흥선대원군 정책
- 개화당과 수구세력 갈등,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방곡령, 동학농민운동 발생
- 을미사변 / 대한제국 성립 / 을사조약 체결

※ 민의 삶(조선시대 아우러서)

⑧ 일제
- 일제시기 선조들의 삶 8 유형
- 강제동원(징용, 징병, 위안부)
* 실상
* 전후의 삶
* 환향녀와 화냥년

본문내용

만명.
이중 유해가 돌아온 경우는 수천 구에 불과하다.
약 5만 구 정도는 일본 각지의 납골당이나 사찰 등에 보관돼 있고,
나머지는 작업장 근처에 가매장된 채로 내버려져 찾을 수조차 없다.
군인, 군속으로 동원된 경우는 사망자가 최소 6만에서 최대 9만3천여 명,
부상자는 8만4천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 징용, 징병
당시의 징용 연령은 최하 22세에서 45세까지 분포돼 있고 평균 연령이 29.4세여서
청장년층이 주 징용대상이었다.
* 정신대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여자들은 강제로 전선으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당하였으며, 전후에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여성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으나,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많았다. 각국 피해자들과 민간 단체 및 정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가 일본에 진상규명과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는 오랫동안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신대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시대 노동인력으로 징발되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 중 ‘여자근로정신대’의 일부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두 제도를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와 더불어 혼용되어 쓰이는 용어가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이다. 이는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 다닌 위안부라는 의미로 강제로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감추려고 일본이 만들어낸 용어다.
현재 공식적인 용어로는 한국, 중국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일본군위안부’, UN 등 국제기구를 포함한 영어권에서는 ‘일본에 의한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가 쓰이고 있다.
* 실상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발발)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늘어나는 주민 강간과 성병을 막고 군의 사기를 진작한다는 명목 하에 ‘군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군이 군 위안소를 만든 시기는 1932년경이며 본격적으로 설치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말부터이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목적, 관리감독, 위안부 동원에 대한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실행했다.
일본,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은 여성들이 은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총 숫자는 적게는 5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가 동원되었으나 정확한 숫자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군부가 규정한 정신대원의 연령은 초기에는 20세~30세 정도까지였다. 기혼자도 가능하나 임신부는 제외하고 성병 검사를 실시하며 근무 기간은 2년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젊은 여성을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끌어가니 해당되는 부녀자가 없게 되자 13,4세의 나이 어린 소녀나 기혼자도 가리지 않고 끌어갔다.
그래서 끌려간 여성들의 나이는 10대 초반부터 40대까지 광범위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식당종업원, 간호사, 여공 모집 등 취업사기에 속아 끌려갔으며, 유괴나 강제 연행 형식으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 일본군이 직접 나서거나 군의 협조 하에 민간인이 동원을 담당하였다.
끌려간 여성들은 열악한 군위안소에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위안소는 군부대 주둔지 근처에 별도의 건물로 들어서거나 군용 막사나 트럭이 이용되기도 했다.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위안부가 같이 생활하는 위안소는 변변한 위생시설조차 갖추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으며, 피해 여성들은 인권을 유린당한 채 소모품 취급을 받았다.
여성들은 하루에 평균 10명 내외에서 3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로 성행위를 강요당했다. 군인들은 요금을 지불했다고 하지만 지불한 요금은 위안부에게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으며, 아예 무료로 운영된 위안소도 있었다.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외출도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성병에 걸려 고생했다. 성병예방을 위해 삿쿠라고 불렀던 콘돔을 쓰게 되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는 군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1~2주에 한 번씩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 전후의 삶
일본이 패망하자 위안부들은 철저하게 버려졌다. 일본군이 패주하면서 소개(疏開) 사실을 알리지 않아 폭격 등으로 많은 위안부들이 사망하였다. 퇴각하면서 위안부들을 한데 모아 죽이는 일까지 자행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하거나, 개별적으로 힘겹게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포기하고 이국에 잔류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 환향녀와 화냥년
안타깝게도 살아남은 피해 여성들의 이후의 삶 또한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가족 앞에도 떳떳이 나서기 어려웠던 이들은 가족과 이웃을 피해 숨어 지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환향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뜻인데 돌아온 여성들에게 더럽다고 하거나 받아주지 않는 일이 많았다.(여기에서 화냥년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들 대부분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 출처
1.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
저술 : 한국역사연구회 / 출판 : 청년사
2.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
저술 : 한국역사연구회 / 출판 : 청년사
3.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jki001/130000161214
4. 네이버 백과사전 ; http://100.naver.com/100.nhn?docid=130742
5. 역사의 천존고 ; http://kr.blog.yahoo.com/shim4ro/1800
6. 디지털한국학 ;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60026.htm
7. http://user.chollian.net/~yoos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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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29
  • 저작시기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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