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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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윤선도의 일생
2. 호의 유래
2. 윤선도의 문학세계
3. 윤선도의 업적
4. 윤선도와 보길도, 해남의 유적지

본문내용

함락되고 임금님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심정을 참지 못하였다. 51세 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기로 결심하고 탐라(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항해에 알맞은 바람을 기다리다가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보길도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윽함에 이끌려 황원포(지금의 등문리 부근)를 통해 보길도에 입도하였다고 한다.
부용동(芙蓉洞) : 낙서재 주변 첩첩이 이어진 산봉우리가 마치 연꽃 봉오리가 피어나는 듯 하여 이곳의 지명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지음.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기록한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의하면, 고산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꾸며낸 부용동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최고의 걸작품으로서 격자봉 아래 북쪽 산자락에 생활의 본거지인 낙서재를 세웠고 푸른 숲속에 기기묘묘한 거석들이 들어선 건너편 안산 산허리에는 동천석실을 세웠다고 함.
낙서재(樂書齊) : 고산의 생활 공간으로 독서의 장소이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주자(朱子)가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지어 은둔한 것과 같이 고산도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주희(주자의 본명)의 경지를 모방하는 생활을 하였음.
동천석실 : 낙서재 앞 안산 기암괴석이 즐비한 곳에 건축한 것으로 이 곳에 와 차를 마시고 독서를 즐기며 사색에 잠겼던 장소.
녹우당(綠雨堂) :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이 82세되던 1669년 이 사랑채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었다고 함.
이 이름은 사랑채 문을 열고 앉아 있을때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흡사 비오는 소리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는 그 푸르름이 선비의 변함 없는 지조를 상징하는 뜻으로도 해석하는 등 여러 설이 있음.
금쇄동(金鎖洞) : 고산이 경진년(54세)에 천연의 금쇄동을 발견하며 금쇄석궤(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고 며칠이 안되어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금쇄동이라 하였다 함.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감춰온 이곳, 그 누가 알랴 선경인 줄을
깎아 지르나니 신설굴이요 에워 두르나니 산과 바다로다.
뛰는 토끼 나는 가마귀 산봉우리 넘나들고
올라와 보니 전날 밤의 꿈과 같음을 알겠구나.
옥황상제께서는 무슨공으로 네게 석궤(錫櫃)를 주시는고’
이 한시는 고산이 금쇄동을 발견하고 지은 <초득금쇄동(初得金鎖洞)>이란 작품으로 이곳을 얻은 기쁨을 표현한 것. 고산은 그의 수필집인「금쇄동기」에서 금쇄동에 관한 산수경관을 자세히 서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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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8.01.22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8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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