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구호일 수 있는가, 박영희 작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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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박영희 연보
2. 낭만주의 문학기(1920-1923년)
- <환영의 황금탑>, <꿈의 나라로>, <월광으로 짠 병실>
3. 경향문학기(1923-1935년)
가) <백조> 붕괴와 신경향파 문학의 선창(1923년)
나) 파스큘라 조직 - 작품 <사냥개>, <지옥순례>, <철야> 분석 포함
다) 카프의 결성
보충 - 카프 결성에 나타난 박영희의 현실의식
라) 계급문단의 조직 확대와 이념
마) 카프의 1차 방향전환
보충 - 박영희와 김기진의 내용, 형식논쟁
계급문학 운동의 노선과 아나키즘 논쟁
바) 소장파 대두와 제2차 카프 방향전환(1930-31년)
사) 제1차 투옥과 전향선언(1931-33년)
아) 제2차 투옥과 카프 해산(1934. 1 - 1935. 12)
4. 순수문학 연구기(1935-38년)
5. 친일문학기(1938-45년)
6. 해방 후 납북(1945-50년)
7. 회월에 대한 인물평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 가장 심했던 단체인 국민총력조선 연맹에서는 문화위원으로서 활동을 했다. 제1차 대동아문학자대회에도 다녀오는 등 친일적인 문학가의 대표로서 각종 정치, 사회적 단체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43년에는 세계 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코자 결성된 조선 문인 보국회에서 총무국장으로 선임되었으며 평론부 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각종 친일적 문예행사를 주도하고 홍보정신대 파견, 출진 학도 격려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조선문인협회의 파견으로 지원병 훈련소를 견학하였으며 영화 [지원병]의 원작을 담당하였다. 「대동아문학자대회 출석을 앞두고」등 다수의 친일 논문 수필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박영희는 ‘요시무라 고도’라고 창씨 개명하여 이를 필명으로까지 사용하였다. 백철에 따르면 필명에까지 창씨 개명한 이름을 사용한 이유를 묻자
“그야 누가 오랫동안 쓰던 자기 필명을 버리고 싶겠소. 하지만 이름 하나 고집하다가 큰 오해를 당하면 어떻게 하겠오. 이런 판국에..”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박영희는 「전쟁과 조선 문학」「국민문학의 건설」「신체제를 맞는 문학」등 수많은 친일 글을 남겼다.
6. 해방 후 납북(1945-1950)
광복 이후 과거 친일 경력을 가진 박영희는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올라가게 되며 친일 시비와 좌우익의 혼란을 피해 춘천으로 간다. 춘천의 공립중학교의 국어교사로 발령 받아 근무하면서 그 당시의 심정과 생활을 후기시 연작 10편과 「우리 동네는 가난한 마을」에서 보여주고 있다. 서울로 돌아온 박영희는 「현대 조선 문학사」를 탈고하고 「사상계」를 연재한다. 보도연맹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가 발발한 뒤 노상에서 체포되어 서대문 교도소로 끌려간 뒤 납북되었다. 1988년 북조선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60년대 거기서 영화 및 시나리오 창작에 관여했다고 한다.
7. 회월에 대한 인물평
‘시대적은 제약 밑에서 의무와 책임 아래 전개된 풍운아적 일생이었으며, 시대의 격랑 속에서 미처 자신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휩쓸려 가버린 불행한 역사의 불운한 선구자’
‘회월은 술도 미시지 못하였고 더구나 방랑생활은 그의 기질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 사람이었고, 성격은 나주 얌전하고 내성적이며, 마음 약한 사람이었다. -박종화’
‘천연동 좁은 방에서 노랗고 홀쭉한 얼굴에 업드려서 밤낮 읽고 쓰며 검은 두루마기, 검은 구도, 검은 벙거지를 쓰고 개벽사에 자주 드나드는 모양인 데 몹시 바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가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하는 것이 퍽 다정다감하다. -[조선문단]’
‘양심적 내성적 그리고 소심한 성품인 동시에 다정한 성격이었다. -김기진’
‘신문학사상 비평을 전담하여 문학비평을 독립시킨 최초의 비평가. -백철’
Ⅲ. 결론
지금까지 시대적 상황에 따른 박영희의 삶을 살펴보았다. 그는 선천적인 총명함과 시대정신에 예민한 감각으로 여러 장르에 걸쳐 특출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회월의 전향 문제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다시 종합해 보면, 첫째 단계는 유미주의에서 1924년 이후 계급주의로의 전향이다. 이 무렵의 객관적 정세가 사회주의 사상이 지평적이었고, 팔봉의 촉매작용과 박영희의 기질이 이지적이었다는 것이 전향의 모티브가 된다. 둘째 단계는 1931년 신간회 사건에서 1934년 KAPF로부터의 전향이 해당된다. 외부적 이유인 신간회건으로 기소되었다는 것과 KAPF의 볼셰비키화로 예술주의가 숨쉴 수 없다는 내부적 이유가 전향의 이유가 된다. 이때 유명한 말인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이란 말을 남겼다. 이는 예술에서 이데올로기를 얻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 자체의 영역을 확대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회월은 유물사관의 이데올로기만 얻고 예술자체를 잃었다고 함으로써 프로문학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렸는데 이는 프로문학도 한국 문학발전에 공헌을 했고, 민족문학의 자기의식화가 프로문학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을 볼 때 의미가 없는 말인 것이다. 즉 회월은 프로문학 전면을 부인하여 KAPF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만 그친 것으로 ‘상실한 예술’을 회복하는 방법 및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다시 유미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은 문학사적으로도 불가능할 뿐더러 그가 십여 년을 두고 이데올로기라는 과학주의를 연구했던 것으로 볼 때 의식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셋째 단계는 1938년 전향자 대회에 참석함으로써 행동 면에서 먼저 나타나 을유 해방까지에 걸치는 친일행위이다. 여러 문단을 거치며 카프 결성에 이르기까지 지도자적 위치에 서 있던 회월이 자신의 삶을 부지하기 위해 친일문학으로 전향한 것은 작가의식의 부족과 함께 아쉬움을 주지만, 이는 한국사회가 처한 객관적 정세에 많이 좌우된 전향임을 알아야 한다. 이상으로 회월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세 단계의 전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회월은 전향에의 고뇌의 흔적을 별로 찾아낼 수 없는, 자기의지가 부족했던 사람임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제약된 우리 시대의 상황이 회월로 하여금 풍운아의 모습을 띄게 만든 것이고, 실제로 그가 남겨놓은 여러 작품들이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때, 회월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보류되어야 할 것이다. .
◎ 참고문헌
김윤식, <박영희 연구> 열음사, 1989.
홍성암, <한국 현대 비평가 연구> 태학사, 1998
윤병로 편저, <한국 근, 현대 비평의 흐름> 성균관대 출판부 2000
이동희 노상래. (1975) 박영희 전집1 영남대학교출판부
이동희 노상래. (1975) 박영희 전집2 영남대학교 출판부
김윤식, <한국현대 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권영민, <한국계급문학 운동사> 문예출판사
이동희, <한국소설의 이해(1906~1945년)> 영남대학교출판부
박영희 외 <한국소설문학대계> 동아출판사
박영희 문학론 연구 -전향과 후반기 문학론을 중심으로 이의춘 서울대학교 1987
카프 문인의 전향연구 노상래 영남대학교 1990
회월 박영희 문학 연구 김승권 중앙대학교 1988
김윤식, 김재홍저 <우리문학 100년>
<박영희 문학 연구-시, 소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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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3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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